우리는 목적을 위하여 살지 않는다. 우리는 살기 위해 목적을 추구한다. 우리는 갈망하기위해
욕망의 대상/욕망의 주체를 정한다. - 권여현
거꾸로 떠다니거나 나뭇가지들 속에서 잠든, 덤불 사이로 걸어 오거나 덩쿨의 그물 속에 사로잡힌 인간의 형상들은 권여현의 숲 연작 속에서 마침내 정적에 도달한 반향들의 세계를 창조해내며 욕망의 시각적 역사들과 긴밀하게 통합된다.
평화로운 고요는 이러한 화폭들에 스며든다.그러나 이 조용한 분위기는 거짓이다. 이는 보는 이들에게 침투되는 개념적 긴장감을 고요함 속에 감추어 속이는 것이다. 왜 이 신체들은 실에 매달려있는 것이며 이 숲의 가상적 공간은 무엇인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처럼, 권여현의 회화 속 숲은 마법, 꿈, 그리고 악몽의 공간이자 수난과 망각의 장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정직한 자기 반영의 길로 이끄는 허위와 반쪽짜리 진실의 장이다.
우리는 어떤 신화와 역사를 우리의 것으로 부를 것인지, 어떤 종교적 전통을 수행할 것인지, 어떤 상품을 살 것인지그리고 어떤 관계들을 타인들과 구축해 나갈 것인지 어떻게 결정할까? 합리적 제도와 논리적 형식들은 우리의 정신, 철학, 존재 그리고 심지어 윤리조차도 보여주기 위해 고안되어왔다. 하지만 우리는 진정으로 합리적이라 할 수 있는가?
계산과 전자 네트워크는 현재 가늠하기 어려운 방법들로 우리의 일상생활을 뒷받침한다. 이러한 범람은 넘쳐나는 기호들의 쇄도로 우리를 압도하기위해 위협하고, 우리가 가능성 있는 존재의 발판을 만들기 위해 사용해 왔던 부서지기 쉬운 지도들을 약화시킨다. 몇몇 이론가들은 이러한 현상을 "포스트모던" 상태라 불러왔으나 만약 우리가 브루노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모던했던 적이 없다”에 동의한다면, 그것은 사실 아마도 사람들, 생각들, 이미지들의 순환속도가 증가함으로 인해 더욱 분명해지는 인간의 영원한 상태일 것이다.
권여현의 회화는 이러한 자전적이고 철학적인 관점 모두에서 비롯된 인간의 조건을 추구한다.
권여현의 회화에서 시간성과 그것의 신비들이 만연한 것은 단지 그가 지난 세기들의 회화양식을 참조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관객들이 하나의 작품 속에서 서로 충돌하고 교차하는 몇몇의 다른 시간대를 상상하게끔 초대받았기 때문이다.
브리콜라주 숲 속 원숭이 나무 (2010)에서 우리는 미셸 푸코 또는 자크 데리다 같은 철학자들이 원숭이로 변해 연꽃을 잡고 있거나 또는 슈퍼맨 차림의 스피노자가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위에서 그들을 압박하는 건축적인 창공과 어우러지며 마치 밀림의 정글로부터 나온듯한 나무에 매달려있다.
언뜻 보기에는 완전히 유기적으로 보였던 아래 구석의 풍경에서 우리는 초고속도로와 원자로의 창발적 형상들을 보게 된다.
리좀 포레스트(2011)에서는 카라바지오의 바쿠스 모습을 한 자화상(1593)이 로봇 기관 장치를 지닌 여인에 의해 다정하게 어루만져지고 있는 스핑크스와 숲을 공유한다. 제목의 아이러니는 '리적' 이론은 다수의 진입점과 시각화의 형태들을 허용하는 마치 권여현의 회화처럼- 것이라고 주장했던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독자들에게는 분명히 이해될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것은 가지를 뻗어 해결되는 경향이 있는, 나무를 닮은 지식의 모델들, 하강의 이원론적 범주에 반대된다. 우리의 기억들과 인식들 아래 시간성은 유동적인 체제가 된다.
권여현의 마음 속 숲에서 나무는 하나의 척추, 혈관을 뻗는 대동맥, 또는 풍부한 시냅스생성-신경세포들을 따라 의식의 매듭을 창조하는 새로운 관계들을 생산하는 뉴런으로써 증식한다.
여기서 우리는 기계로서의 정원에 사로잡힌 수심에 잠긴 살, 역사의 덩굴 속에 둘러싸인 신체들, 기억의 그물망 속에 얽힌 것들을 찾는다. 이러한 기억들은 작가에게 속함과 동시에 또한 다수의 관객, 그리고 그들 각자의 미술사와 관념에 대한 노출에 속한다.
중요한 면에서 권여현은 작가의 작가이며 그것은 단지 그가 기법의 정통함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레퍼런스가 앙리 루소부터 빈센트 반 고흐까지 광대한 범위의 구상주의적인 화가들부터 김응환 그리고 단원과 같은 18세기 한국의 대가들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브리콜라주 숲속 에로스와 프시케(2008)에서 누군가는 김응환의 풍경화 강안청죽도를 연상시키는 소나무의 앙상한 나뭇가지들을 찾는다. 그러나 나무 둥치의 각도들은 과장되고 추상적이며, 반 고흐의 올리브나무(1889) 나무들같이 짙고 부자연스러운 강렬한 파랑으로 채색되어있다. 이 파랑색은 지난 10년간 어린아이들에게 인기 있었던 장난감, 나뭇가지 아래에서 밖을 엿보는 토마스 기차를 묘사하는 파랑에서 반향 되고 있다.
하이브리드 사슴으로서의 다이아나-프리다(2008)에서 작가는 프리다 칼로의 상처입은 사슴(1946)을 빌어와, (차용하여, 빌려와) 루소에게서 영감을 얻은 듯한 사냥 풍경에서 마치 뒤쫓는 동시에 쫓기는 듯 보이는, 레오카레스(루브르)의 고전 그리스의 조각적인 묘사처럼 포즈를 한 다이아나로 변형시킨다. 여기서 다시 토마스 기차는 정원의 뱀처럼 풍경사이를 구불구불 나아가고, 어쩌면 그것은 상업문화가 자연을 침범하고 아이들이 독립적 삶과 여성의 신체를 침해한다는 표시일지도 모른다. 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레퍼런스들에 덧붙여 누군가는 뒤틀린 덩굴들을 구성하는 붓자국 속에서 미국의 추상화가들 데이비드 리드 또는 조나단 라스커의 초기 작품, 이에 못지않은 데이비드 살의 도상학적 질감의 레이어링 속에서 발견되는 3차원적 깊이의 환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권여현의 회화를 들여다 보는 것은 역사적인 전형들과 철학적 레퍼런스들을 보는 것일 뿐만 아니라, 화가들 그리고 재현의 체계 사이의 대화 - 심지어 논쟁까지도 보는 것이다. 지식, 지혜, 아름다움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 것인가? 연꽃, 폭포, 여성의 몸으로(을 이용하면 될까? 포토리얼리즘은 표현적 화법보다 더 나은가? 그들 각각은 세계를 다함께 엮으며 권여현 만의 제스처와 색채적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리좀적인 뒤틀림과 회전 속에서 하나의 선택으로써
그들 스스로를 나타낸다.
권여현의 창세기 숲(2011)의 중심에 등장하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1794)에서 강한 바람에 몸을 드러낸 인물 유리즌은 세계에 삭막하고 합리적인 질서를 부과한다. 손가락들 사이의 기계적 디바이더와 함께 그는 이미지 아래 프레임을 형성하는 이중 텍스트:창세기 외전과 파괴 위를 맴돈다.
창조와 파괴의 이항대립보다도 권여현은 일곱개의 사해성서중 덜 알려진 창세기 외전에서 제안된 불확실한 인류의 기원과, "파괴"는 주의깊은 데리다적 사유조건의 “해체”에 의해서 대체된다는- 분쟁의 영역을 제공한다.
원숭이, 뱀, 그리고 올빼미처럼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형상들은 그들이 창조와 지식에 대한 기원전 이야기들 속에서 연기해왔던 중요한 역할들을 대신한다. 그리스 신화의 뱀 오르피온은 만물의 여신 에우리노메와 결합하기위해서 그녀의 신체를 휘감는다. 마야 신화에서 원숭이들은 영적 선구자들이자 인류의 손윗형제들이었고,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전통적으로 하나의 사유체계가 사라지면서 새로운 것이 태어날 때 찾아오는 지혜의 상징으로써 보여졌다. 또한 동물들은 비록 인간의 상징주의 그물망에 걸려들지라도 그것의 바깥쪽에 존재한다. 그들의 숲 속 서식지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창세기 숲은 우리를 이러한 이중적 읽기의 숙고로 초대하며, 거의 인정되지 않았던 인류와 동물사이의 친밀한 관계들을 열어놓는다.
권여현은 "오필리아의 죽음은 햄릿을 구할 수 있다. 햄릿의 복수를 완수하기 위해 오필리아가 죽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가 캘리포니아에서 레지던시를 하는 동안 제작된 그의 가장 최근 연작인 숲 회화에서 오필리아는 가장 중심적이고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된다. 리좀트리 속 오필리아(2014)에서 여인의 형상들과 동물들은 고요함 속에서 쉬고 있다. 그들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이동하거나 건너가지 않는다. 그물들에 잡히고 거꾸로 뒤집어진, 마치 파란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은 페인트 방울들에 덮여진 이 살아있는 피조물들은 완전히 자유의지를 상실한 듯 보여진다.
나무 둥치에 기대어 꼿꼿하게 서 있는 여인의 모습에서 조차도 그녀의 양손은 험한 덩굴들의 구속 속에 나무 둥치 뒤로 묶여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오필리아는 부러진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개울 아래 그녀의 죽음에 이르기 전에 미쳐버린다. 그녀의 신체는 꽃들에 둘러싸여 떠다니고 그녀는 비극적이고 희생적인 순수한 죽음의 상징이 된다. 수많은 작품에서 불멸의 존재로 묘사되었지만 가장 유명하게는 존 에버렛 밀레(1851)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엔 몇 가지 논쟁이 있다: 그것은 자살이었을까?
또 다른 버젼의 리좀트리 속 오필리아(2014)에서 푸른 물은 미지의 원천으로부터 폭포처럼 나와 깊은 수심 속으로 쇄도한다. 작가가 그의 고향은 합천이라고 밝히자 하나의 단서가 떠오른다. 합천 수력발전 댐은 1980년대 초기에 지어졌고 그 마을풍경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작가는 적는다. "현재 내 유년시절의 기억들은 해저에 침식되고 사라졌다." 우리는 그의 몇몇 페인팅이 제안하듯, 이미 스스로를 우리의 올가미에 매달고 있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일까? 누가 희생되고 있으며, 그들은 결백한가? 댐들이 제공한, 우리가 그토록 열렬히 욕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권여현의 회화 속에서 욕망은 덫이자 미끼요, 끊임없는 유혹이다. 욕망은 말과 몸짓에 선행한다. 또한 그것은 우리를 앞으로 이끄는, 우리를 변화, 삶, 출산, 탐욕, 파괴의 방향으로 끌고가는 장치다.
인류들은 사물을 해체하기 위하여 그것들을 하나로 조립해왔다-아이들의 행동이 이를 상기시킨다. 욕망은 생기를 불어넣는 힘, 끝없는 에너지이며 하나의 동력이다: 또한 우리의 욕망들은 언제나 타인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여기, 역사적 현재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욕망들이 무엇이 되는지 목격한다: 소멸의 길. 인류는 세계를 욕망해왔다. 아마도 세계가 사라져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그럴 것이다. 그러나 고전적으로 서로 대비되는 두 가지 힘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맞물린 복합성, 우리의 시간들을 규정하는 역동적 흐름을 창조하며 떠오른 겹겹의 역사들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이 네트워크는 단지 덫이 아닌 권여현의 세계에서 정맥과 동맥의 역할도 함께 한다. 과거는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현재에게 먹이를 공급하고, 현재는 덫에 걸려있으며 과거에 고안된 체계적 일상, 환상에 의해 지속된다.
그러나 여기엔 도피를 위한 공간이 있다. 기호적 네트 안에는 틈이 있고 이를 통해 세계가 정의되고 발견되고 규제된다.
미래는 여전히 예측 불가능하다. 비록 우리가 갈수록 더 우리의 자기파멸을 두려워하지만 권여현의 예술작품은 전적으로 비관적이지 않다. 삶이 있는 곳엔 희망이 있다.
리는 유기체계에 속한 유기체 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 자신을 인위적으로 분리할 수 없다. 분리의 환상 그것이 진정한 위험의 근원이다. 환영은 그 자체로 환영적이다.
Kwonyeo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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