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인간은 하나의 육체와 정신, 하나의 과거, 친구들과 적들, 그리고 자기가 꾸려나가야 할 생을 가지고 있다.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에는 무수한 사물들이 함께 있다. 그러나 사물들이 그대로 <있는>반면 인간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이 세계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은 이 세계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자신이 존재함을 인식함으로써 인간은 무수한 사물들과 타자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주체가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세계속에서 <대자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존재는 그의 의식 속에 반영된다. 이러한 것, 자신의 존재함에 대한 자각은 한 인간의 독특하고 침범할 수 없는 자아의식을 확립하는데, 이 자아의식은 다른 의식과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형성될 수 있다.
그러나 <사물들>은 어떠한가?
여기 내 책상 위에 놓인 유리잔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유리잔은 여기에 <놓여져 있다> 이 잔이 자신의 논리를 소유하고 있는가. 유리로 제작된 이것이 자기만의 성질과 태도와 이유를 가지고 존재하는가. 이 유리잔은 하나의 존재이기 이전에 존재하며, 자신이 어떤 것임을 결정한다. 인간은 자신이 처해 있는 세계에 대해 자신의 결단으로 의미를 부여한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이 명제는 싸르트르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란 제목을 붙인 한 강연에서 주장한 것이다. 이 명제를 인용함으로써 내가 전후 전 세계의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 풍미했던 실존주의란 탁월한 자유의 철학을 되새김질하고, 그 아류를 증식시키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근본적으로 철학자가 아니며 철학적 사고에 대한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바도 없다.
그러면 왜?
나는 왜 이글의 서두부터 지루한 철학적 문구와 덜떨어진 철학적 물음을 늘어놓고 있는가? 나는 지금 여기에서 나의 사랑하는 동료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숱한 <작업>을 바라보고, 참여하고 공감하며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적절한 언어와 방법으로 기술하고 해석하여 <소통>의 최소한의 길이나마 열어보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이른바 평론가를 지망하는 사람이다. 한때 화가가 되기를 꿈꾸었고 그 희망이 다른 방향으로 굴절되어버린 지금 나는 내가 지녔던 꿈과 욕망과 열정을 내 동료의 <노동의 결과물>에 투여하고자 한다.
그러나 누가 한 작가의 예술세계에 대해 전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며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어차피 작품은 하나의 의미체계로 저기 내 앞에 있는 것을, 또한 그것이 <읽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인 바에야, 나의 이 한계를 잘 알고 있는 나는 이 글에서 한 젊은 미술가의 의식과 방법에 대하여 나의 사색과 탐구, 그와의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느낌>과 깨달음, <공감>과 <거부>, <요망>과 비판의 말문을 열고자 한다.
내가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권여현은 두 개의 자주가 지탱해 주는 자기의 영토, 그 내밀하고 자기충족적인 공간을 가꾸고 있는 젊은 작가이다. 그의 이 땅을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은 실존주의란 철학과 미술이다. 나는 그가 꾸며놓은 이 영역 속으로 스며들어 그가 부르고 있는 노래와 중얼거리고 있는 혼잣말과 난해한 사상들로 가득 찬 일기장 등을 듣고 들춰보면 그의 인간됨과 생각, 조형세계를 파악해 볼 것이다.
그는 왜 자신의 작업에 대하여 굳이 철학적 배경을 설정하고 있는가. 그가 말하고 있는 실존주의 철학이 그의 작품 속에 제대로 구현되고 있기나 한가. 그는 이러한 것에 성공할 것인가.
권여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현대’라는 애매한 말로 규정되고 있는-가 기계문명의 발달에 따른 인간소외의 시대라고 파악하고 있다. 기술성이 인간성,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며, 개인의 거대한 기계 속의 부품, 즉 톱니바퀴가 되어버렸고 타락한 세계의 중성인도 <던져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술 내적인 맥락에서도 새로운 정통을 창조해 보려는 열망과 갖은 실험과 개념, 전위에의 신념이 역설적이게도 보수적인 규범이 되어버린 역사적 한계속에서 평면 회귀에 대한 지향점은 오히려 소우주 창조라는 평면의 마성을 더욱 확고하게 하고 있다고 그는 파악하고 있다.
그는 인간이 죽음이라는 한계 때문에 최선을 다 하듯이, 평면의 한계내에서 최선의 시대정신과 누적되어 온 양식과 환영을 일으키는 고안들과, 점진적으로 체득한 다양한 기법을 총체적으로 수렴하려는 의지의 귀결로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작업의 6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1) 견고하고 두꺼운 배경과 나중에 얇게 그려진 인간
2) 부분적인 이질 추상과 전체적인 구상성
3) 단계적으로 제시된 제작의 과정과 차원
4) 각 부분을 이루는 적절한 다른 양식들
5) 드로잉의 원리 - 과감한 구도, 날카로운 직선, 강렬한 광선, 다른 공간들의 조합.
6) 전면 이질 추상은 내용과 색채에 의해 통합된다.
그가 제시한 이 6가지 원칙은 그의 주장대로 형식과 내용, 추상성과 구상성의 합일을 위한 작업과정의 구체적인 방법론이다.
이것은 그의 그림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 즉 인간은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이며, 인간 근원의 광범위한 공포와 절망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실존주의적 가설을 화면에 가시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수립한 그 나름의 법칙이다.
그의 이 원칙이 화면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실제적으로 작품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면서 검증해 보자.
피투성.불안.출구를 찾아서
이리하여 나는 슬프게도 체념을 배웠다.
언어가 없는 곳에 사물은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 슈테판 게오르게 -
내가 이 글에서 제일 먼저 말하고 싶은 작품은 [던져짐-27]이다. 돌로 만들어진 거대하고 육중한 이 공간은 흡사 신전을 연상케 한다. 무채색의 무거운 공기를 한꺼번에 빨아올릴 듯 소용돌이치는 천정 아래 창백하고 진지하며, 우수와 고독, 한편으로 비애까지 자아내는 표정을 하고 있는 인물이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란 것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의 규모에 비해 이 인물이 차지하고 있는 면적은 지나치게 협소하며 더구나 흉부아래가 잘려 있다. 우리는 이 잿빛 인물로부터 향로로, 저너머 재단 위에 뉘어져 있는 제물로로, 그 뒤에 출구없이 끊임없이 이어질 것 같은 화랑의 미궁으로 시선을 옮기게 된다. 르네상스의 원근법에 충실하게 그려진 이 고전적인 신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막힌 창은?
이 석조건축은 하이데거가 온갖 형이상학적 수사학과 놀라운 상상력을 동원하며 예찬해마지 않았던 그리이스 신전을 생각하게 한다. 신전의 건립은 봉헌과 찬양을 위한 것이다. 신전이 있음으로 해서 그 신전 가운데 신은 임재한다. 그러나 권여현이 만들어낸 이 신전에서 성령의 불꽃을 발견할 수 있는가. 재단위에 누워있는 저 인물이 신의 명령에 따라 아들을 제물로 바친 아브라함처럼 성스러운 제사의 희생물이란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가.
권여현의 이 신전에는 하이데거가 말한 <세계를 열고 동시에 세계를 대지 위에 세우는 것으로서의 신전>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당연하게 이 공간은 그의 의식, 지극히 개인적인 의식을 좇아 이루어지는 자기의 심리적 공간이다. 이 구역 안에서 그는 제사장이며 몽상가이다. (예술가의 원형은 제사장이었다라는 추혼을 상상해 보자) 그는 또 하나의 자신을 제물로 봉헌하는 의식을 접전하고 있다. 이 고독한 사제의 의식을 도울 들러리나 신자는 없다. 그는 이 거대한 신전 속에 내던져져 있다. 숭고하며 내밀한 지기희생을 위해 정적과 고독, 일면 신비롭기조차 한 분위기가 그를 엄습하고 있다. 이 차갑고 육중한 벽 속에서 그는 외로운 개인이다. 실제로 그의 많은 작품속에 등장하는 인간이 개인일 경우가 많다. 과거의 작품 중의 하나인 [불안]은 더욱 현저하게 이 세계에 던져진 한 개인의 존재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말하고 있다. 잘 정돈된 화사한 응접실의 어느 모퉁이에 서 있는 이 인물은 무엇인가 놀라운 장면을 목격한 사람처럼 경악과 두려움으로 가득찬 표정을 하고 있다. 딱 벌어진 눈과 얼어붙은 듯한 포즈에 비해 배경의 실내공간은 장식적이리만치 잘 꾸며져 있고 또 정돈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도 인물은 중심부에서 이탈하여 화면의 외곽에 놓여 있다. 인물의 이러한 처리는 그가 입안한 6원칙을 상기시켜 준다. 견고하고 두꺼운 배경과 나중에 얇게 그려진 인간이란 제 1원칙이 인간의 피투성과 소외를 극명하게 표출시키기 위한 것임을 그는 애써서 증명해 보이려고 하고 있다. 물감을 두텁게 찍어바른 배경처리에 비해 인간은 상대적으로 얇고 빠른 붓질로 그리며, 무엇보다 이 거대한 화면의 중심부에서 밀려나 있다. 그의 초기 작품의 배경은 현재 우리가 삶을 영위하고 있는 생활공간인 경우가 많았다. 응접실, 주방, 서재, 화장실 등의 일상적인 삶의 공간은 인간에게 안락함과 답답함 그 두가지를 동시에 준다. 실내의 안락함은 가슴속에 숨쉬는 자연인의 능동정신을 가축이 가진 온순함으로 전환시킨다. 견고하게 구획된 방과 정확한 이성으로 계산된 거실과 부엌, 화장실의 원근법은 마치 대량정보와 인간의 수평화를 가져온 기계문명처럼 인간성 소외, 감각 소외, 정신의 소외를 촉진시킨다. 그가 의도하는 바는 인간의 소외를 드러내는 것, 즉 탈은폐이다.
그렇다면 소외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거의 일상적으로 소외에 대하여 말한다. 소외란 무엇인가로부터 또는 누군가로부터 격리.이간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주체로서의 인간과 객체로서의 세계 또는 제2의 자아 간에 큰 틈이 벌어져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소외’라고 말한다.
실존주의자들은 소외란 개개인의 자유가 매몰되는 함정이라고 했다. 박탈과 격리의 감정은 그의 그림에서 곧잘 벽으로 펴현되고 있다. 다시 그의 신전으로 되돌아 가보자. 자화상의 뒷면에 가로놓인 저 육중하고 견고한 벽과 그가 대학원 재학시절에 그렸던 [삼손2]에서 유대민족의 신화적인 영웅을 상상하게 하는 인간이 온 몸의 힘과 정신과 기를 모아 떠밀고 있는 벽, 그리고 그의 그림에서 무수하게 등장하고 있는 벽의 이미지는 거의 강박관념에 가까운 세계와의 단절, 그 막연한 속박감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나와 세계와의 교호를 차단하는 장막일 뿐만 아니라 침묵과 순응을 강요하는 힘의 집적물이다. 감금에서의 불안, 폐쇄, 깨트릴 수 없는 한계, 유폐, 단절 등의 심리적인 위축과 상처가 저기 벽으로 거대하게 서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다른 작품 [던져짐-28]은 그의 재치넘치는 항변을 보여주고 있다. 전자오락기 위에 <실존공간>이란 글을 새기고 그 아래 모니터 속에는 자신의 작품 하나를 모사하여 그려넣고 있는 이 작품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정확하고 솔직한 표현대로라면 이 그림의 아랫부분에 그려진 신발은 거꾸로 놓여져야 한다. 속임수에 능하고 교활한 이 오락기는 역설적이게도 <실존하는 공간>을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허망한, 믿을수 없고 공허한 부재의 공간을 보여주고 있다. 조종자의 부재,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사된 화면 속의 인간. 그 인간의 절규하는 듯한 움직임은 마치 손잡이의 방향에 따라 춤을 추는 꼭두각시의 그것처럼 어색하다. 이 작품에서 권여현이 의도하고 있는 내용은 너무도 명백하고 또 그런만큼 단순하다.
-인간의 삶은 신의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신은 종교에서 말하는 전지전능한 절대자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을 제어하고 있는 온갖 것들, 무이성적이고 비인간적인 기계, 인간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드는 한계상황, 인간존재를 통제하고 있는 제도 등이 마치 신처럼 거대하고 교만하며 엄청난 위력과 술수와 권력을 동원해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던져진 존재로서의 인간의 이미지는 [던져짐]]이란 제명으로 제작된 일련의 연작에서 여러번 시도되고 있다. [던져짐-14]와 [던져짐-16]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시기의 연작은 대체로 장식적인 색채와 평범한 구도, 다소간 상투형이란 혐의를 모면하기 어려울 듯한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고 있다. [던져짐-14]의 경우를 보자. 그의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진 화려한 주홍빛이 넓게 천정을 차지하고 있고 그 아래 마치 역사인 듯한 남자가 기둥을 떠밀고 있다. 그러나 이 인물은 힘을 사용하는 장사가 아니라 무용수이다. 권여현은 자주 자신의 그림속에 무용수의 이미지를 따온다. 그것은 주로 무용 전문잡지나 화보집에서 차용한 것이다. 화가가 사진을 인용한 역사는 오래된다.
중요한 것은 그가 사진의 이미지를 화면에 옮겨 그린다는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화면에 어떤 맥락으로, 화면의 내적 구조를 조직하고 긴장을 유발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점에서 그는 얼마간 실패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우선 무용수를 인용하는 것이 매우 애매하고 억지스러운 점을 들 수 있다. 신체를 가장 극적으로 사용하는 무용수의 날렵한 동작을 통해 <던져짐>이란 상황을 그려내고자 했던 그의 의도에 비해 화면은 정채적이고 평범하다. 얼버무리는 듯한 제스츄어와는 다르게 과잉된 의미부여의 흔적이 역력한 이 작품에서 내던져진 인간의 실존적 불안과 긴장을 발견하기란 어렵다. 과도기적 단계라 할 수 있는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이 처한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알리바이를 마련하기 위해 인간의 형상 위에 상자를 만들어 씌우고 있다. [던져짐-16]에서 볼수 있듯이 여자 무용수는 몇 개의 선이 구획해 놓은 상자에 갇혀 있다. 이 상자를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것과 비교해 보자. 베이컨의 짓이겨진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상자에 비해 그의 이 상자의 설득력은 약하며 일면 작위적이기조차 하다. <던져짐>의 이미지가 화면에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데서 오는 자구책으로서도 이 선이 가지는 의미의 힘은 약하다. 한편으로 그의 작품에서 풍기는 서구적인 분위기- 뉴욕화파를 생각하게 하는 화련한 색채와 모델이 주로 서양의 무용수이고, 그 배경 또한 서구문화권에서 이루어진 건축양식을 본뜨고 있다는 등의-를 상쇄하기 위한 그 나름대로의 고민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예컨대 [던져짐-15]의 경우 지금까지 도입해 왔던 서양의 무용수 대신에 고려시대의 인물을 화면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던져짐-16]의 오른쪽 계단 난간 끝이 장승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 그렇다. 연자방아와 석유난로의 대비, 장승의 형상을 옮겨놓은 기둥 등에서 자신의 변명에 가까운 탈출구를 찾고 있으나 그것은 명백히 절충주위, 위장된 통합에 불과하다. 이른바 ‘한국적’이미지는 단지 소품일 뿐 작품에서 의미있는 내용을 환기시키지는 못한다. 아마도 한국적인 것을 그려야 한다는 자신의 강박관념에 가까운 요구와 주변의 지적에 쫓기듯 서둘러 한국적인 것을 찾으려 하는 데서 오는 어정쩡함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던져짐> 연작은 화면의 조직에 있어서 조형적인 성공을 보여주고 있다. 균형잡인 구도와 끈기있는 화면에의 집착, 심미적인 색채, 충실하고 모범생적인 묘사 등에서 그가 지닌 성실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추상회화를 연상하게 하는 두터운 마티에르의 배경, 꼼꼼하고 침착한 인물의 재현 등은 다소 보수적이라 하리만치 교육의 영향을 잘 반영하고 있다. 같은 실기실에서 근 5년 동안 같이 배우고, 같이 그리고 지켜본 나에게 권여현은 서울미대의 독특한 분위기를 가장 잘 몰려받은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보여진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결코 학연이나 학맥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보수적이란 지적을 받으면서도 개성의 함몰을 용인하지 않는 이 학교의 학풍이 그에게 반영되고 있다는 것이 비단 나의 근거없는 편견일까.
권여현은 우리 나라 미술이 변화의 진통을 겪고 있던 시기에 대학에서 수업받은 세대이다. 80년대 초는 우리 미술학에게 미술이란 무엇인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으로부터 출발하여 미술의 사회적 소통과 기능에 대한 질문이 터져나오던 시기였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정치적.사회적 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고통에 찬 회의였으며 이 과정에서<민중미술>이 형성 되었다. 정치적, 대사회적 고발과 발언이 담긴 미술의 부상을 목격하면서 그는 미술에 있어서 <내용의 회복>을 자각하였지만, 젊은 미술가들이 많이 참여한 이러한 경향과는 달리 인간의 실존과 개인의 자유, 실존주의 사상의 핵심이 되는 한계상황, 심리적 소외 등의 표현에 주력해 왔다. 미술이 인간을 위한 의미있는 체계이자 가치있는 활동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로 하여금 철학적 내용으로 눈을 돌리게 한 만큼 그의 작품에는 언어의 서술성이 내포되어 있다.
무릇 언어가 모든 문화의 전달수단이듯이 인간은 무엇보다 말하는 존재이다. 언어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각 개인간의 의사를 소통시키는데 있다. 미술가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외롭게 이루어진 작품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줌으로써 공감받기를 꿈꾸는 사람이다.
무의미한 행위만을 위해 작업하는 미술가는 없다. 만약 무의미한 것을 위해 무의미한 작업을 늘어놓는다면 그야말로 무의미한 존재일 것이다.
이렇듯 미술가는 보여준다. 그것은 새로운 부활을 위한 위험하고 두려운 모험행위이다.
보여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자신의 약점이 노출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 노출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드러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그 노출을 통해 그가 여러분과의 대화의 길을 열 수 있으므로. 언어가 없는 곳에 그의 작품 또한 없을 것이므로
비판
권여현이 지향하고 있는 몇 가지 실존주의적 주제는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비판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그가 가장 심각하게 다루고 있는 <피투성>을 보자. 실존주의는 인간을 전혀 낯선 환경에 내던져진 존재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역사적 관계를 따지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즉 인간은 무의미하고 부조리하며 우연적으로 이 세계에 던져져 그 속에 살도록 운명지워진 존재가 아니라 기원과 역사를 가진 존재이며 더구나 사회적 존재이다. 실존주의가 견지하고 있는 극단적인 주관주의의 함정에서 그의 작품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개인의 실존에 대한 주목은 자칫하면 자유로운 선택과 인간의 과거 사이의 연관성, 즉 인간성의 존재론적 연속성을 거부함으로써 자유를 비합리적이고 우연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을 단지 무기력한 존재로만 다룰 뿐만 아니라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조장한다.
현대사회에 있어서 인간의 소외와 기술만능주의, 물신숭배라는 비인간화 현상을 실존주의는 제대로 밝혀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고귀한 야만인을 강요한다. 이런 점들로 비추어 그의 회화가 담고 있는 내용의 한계는 극복되어야 할 하나의 숙제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