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새벽무렵이었던가. 넌 그런 이야길 했었지. 국민학교 5학년 때부터 대학입시때까지 여학생만 다니는 미술학원에서 오로지 소묘와 정물화만 그렸었다고, 그래서 지금도 풍경화를 못그린다고.
당시까지만해도 나는 네가 답답한 실내 한 쪽 구석에 처박힌 인간들만 그려내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고 내 나름대로는 왜 그 갑갑한 벽면을 확 부숴버리지 않는지에 대해 내심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 벽면에 대한 네 최초의 설명은 ‘끊임없이 인간을 위협하는 현대기계문명의 파괴적 구속력’ 이었다. 시대정신? 좋은 말이지.
그로부터 2년쯤 후에 네 대학시절 이야기를 들었지 아마? 머리칼에 대한 콤플렉스로 인해 동기생들 얼굴도 잘 모를 정도로 실기실 구석에서 그저 과제물이나 열심히 매만지고 있었던 얌전하고 패쇄적인 모범생. 그래, 실내가 오히려 익숙하고 구석진 곳이 더 편안했으리라. 그래. 네 그림은 현대인의 보편적인 소외현상보다도 네 자신의 콤플렉스에서 기인하는 심리적 폐쇄성의 산물에 더욱 가까웠고 실제로 어느 정신과의사도 그렇게 말했었다.
네 그림속에 존재하는 벽면은 바로 그 콤플렉스라고.
그러나 백란미술학원 이야기는 벽면의 유래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을 가능케 해주었다. 그 흔한 풍경화 한 장 그려본 일이 없이 8년씩이나 여학생들에 둘러싸인 유일한 남학생으로서 오로지 학원장 단 한 사람의 말에만 귀기울이던 창백한 소년. 물론 네 얼굴에선 이미 우수와 몽상.도피와 환락의 경계선을 엿보는 듯한 아슬아슬한 냄새가 나지만 너의 여성적 온화함, 심리적 폐쇠성과 수동성, 세련된 장식성들의 상당부분은 아마도 백란미술학원 당시의 영향이리라 쉬 짐작할 수 있었다. 중요한 점은 너의 실내와 벽면들은 콤플렉스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네 자신의 삶과 기억속에 이미 뿌리박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그 벽면은 과거의 기억속에 존재하는 미술학원의 폐쇄적인 공간이며, 대학 실기실의 높고 흰 벽과 실기실 구석의 얌전한 모범생이 비쳐있고 서구적 세련미가 풍기는 너의 옷차림과 납작하고 부드러운 쥐색 구두가 걸려있고 소파와 팝송과 커피가 있는 압구정동 화실이 들어앉아있다. 거기다가 람보나 대부. 이소룡같은 현대판 깡패 건달들의 영화나 보고 허공에 주먹을 날려대며 당구장에 들어서는 모범생의 자기과시적 궤도 이탈과 자기방어적 제스츄어까지도,
그러나 문제는 ‘왜 실내에 갇혀 있느냐’가 아니고 ‘ 언제까지 실내에 갇혀있을 것인가’이다. 네가 살아온 방식보다는 앞으로 살아가야 할 방식이 더중요하듯이 우린 곧잘 과거와 현재상태에 대한 단순한 해명보다 미래에 대한 비젼의 유무나 실천적 행동의지의 강약을 가늠해 보고 싶어진다.
‘인간은 지상에 내던져진 유한한 존재이며 스스로가 만들어낸 인위적인 굴레에 함몰되어 가는 나약한....현대인이 어쩌고 저쩌고’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사람들은 투덜거리기 시작한다. ‘또 그놈의 소외로군.’
그렇다. 사실 우린 너무나 많은 매체와 예술장르를 통해 인간의 절망과 부조리.현대인의 고뇌와 소외를 눈귀가 따갑도록 보고 듣고 배워왔기 때문에 자칫 소외현상 자체의 단순한 제시는 그야말로 안일한 작가정신이요 무책임한 시대정신으로 보이기도 한다. ‘나는 외롭다. 인간은 괴롭다.’... 그래서 어쨋단 말인가? 사람들은 시대에 대한 진부한 진다의 결과를 듣고 싶어하는게 아니라 보다 효과적일지도 모르는 새로운 처방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다.
“여기에 상처가 났군요.”
“무슨 약을 발라야 하나요?”
“여기가 상처란 말입니다.”
“아 글세, 무슨 약을 바를까요?”
“여기가 상처.....” “제기랄”
소외가 이야기되었다면 그에 대한 해결책 또한 제시되어야 한다. 자살이건 종교건 도피건 망각이건 약도 없이 병만 가르쳐 준다는 건 함께 죽자는 이야기밖엔 안된다. 밀가루를 개어바르든 물감을 떠 먹이든, 하다 못해 이를 악물라는 이야기라도 해 주어야 한다.
너의 표현대로 실내의 안락함은 ‘가슴속에 숨쉬는 자연인의 능동정신을 가축이 가진 온순함으로 전환시킨다’면 ‘가축’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탈출은 필연적이다. 네 초기 작품에서 나타나는 반항과 탈출의지와 격렬한 몸부림은 이해할 만하다. 우람한 근육질들과 이소룡류의 세속적인 영웅, 삼손과 같은 신화적 영웅들이 너의 벽면들을 까부수고 있을 당시만 하더라도 나는 희망적인 도전속에서 승리를 확신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웬일인가? 시간이 흐를수록 너의 벽면은 난데없이 알록달록 장식성만 더해갔고 너의 ‘던져진 인간’들은 탈출도 초월도 반항도 모험도 아닌 공허한 제스츄어로 일관되어갔다. 우리속에다 예쁜벽지를 바르고 여물을 기다리는 동안, 에잇, 춤이나 추자고 일축들? 배고픈 자유보다 손쉽고 배부른 부자유? 그래 가축들 ! 아무런 비판도 저항도 없이 거듭되는 맹종과 안일속에서 독버섯자처럼 자라가는 소시민적 안락과 명성에의 유혹과 집착들. 엄청나게 부풀어가는 핑계거리와 궁색한 자기변명, 이기적인 자기합리화들, 조심해야 한다. 네 말대로 ‘한 자리’얻어 잡으면 으레 튀어나오는 허세와 권위의식에 가득찬 그 싸구려 속물들의 세계, 그 쓰레기 장사치들의 세계를 넌 나 보다 잘 알고 있다. 조심하여라, 넌 이미 너의 온화한 표정과 약삭빠른 말솜씨로 상당한 인맥을 확보하고 있다. 게다가 여기저기 작품도 꽤나 출품했고 펼쳐 놓은 일도 많은지라 젊은 날에 일찍 알려진 편이다. 먼지낀 세상에서 보고 듣는게 많으니 나쁜 짓부터 배울까 자기반성에 충실하란 말이다. 끊임없이 세 속의 풍진을 털어내는 고된 자기정화가 없다면, 그 긴장된 정신의 가출과 모험도 없다면 존재와 생명과 미래에 대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해답의 기미를 찾기 위해 눈과 손과 머리를 혹사해야 하는 치열한 예술정신도 없다면 도대체 젊은 예술가는 무엇이란 말인가?
예술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물론 너는 나름대로의 작업에 충실해 왔다. 조금만 열심히 그려도 돋보이는 시대. 한국미술로 보면 불우한 시대요, 개인적으로 보면 이름얻기에 퍽이나 수월한 시대. ‘한 오년 쯤 그림만 그린다면야..’하면서 자만하는 젊은 작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시대. 상대적으로 넌 열심히 작업하는 젊은 작가로 인식되기에 충분했다. 좋다. 천재는 콤플렉스가 있어야 한다고? 좋다. 장식성 ? 도피적 몽상? 폐쇄적 자의식의 공간? 그래, 넌 너의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어내는 능력과 너의 콤플렉스를 천재의 징표로 꾸며내는 용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너의 벽면은 알록달록해졌고 탈출의 절박함도 그에 맞춰 사라져갔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정신과 의사의 말대로 알록달록해지긴 했으나 여전히 벽면은 남아 있다. 망각? 얼마나 오래갈까?
너는 다시 깨어나야 한다. 얼마나 많은 재료와 얼마나 많은 세계가 존재하는가? 또 얼마나 먼 길을 넌 혼작 걸어가야 하는가?그 길은 얼마나 자주 막히고 끊어지는지, 우리가 살아서 그 언덕을 넘어 갈 수 있을까?
달리 무슨 할 말이 있으랴. 죽기 아니면 그림그리기. 우리가 젊은 천재들과 위대한 거장들의 지순한 혼백을 만나는 길은 오로지 그 길밖엔 없다. 그것이 가장 가까운 길이다. 죽기 아니면 그림 그리기. 이 땅의 젊은 작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