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조명된 인간과 그 실존

강호정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첫느낌은 이방인(異邦人)이라는 소외된 감정과 실망감이었다.

혼자서 작업하기에는 넉넉한 공간이었으며, 화가의 아틀리에로서는 별다르게  손색이 없어보이는 환경조건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서있을곳도, 앉을 만한 곳도 찾아보기 힘든 여유없는 공간이었다. 그 완벽한 어질러짐 속으로 초대된 손님(?)으로서의 받아들여짐은 당황과 허탈 그것이었다.

더욱이 감정에 긴장을 주었던 또하나의 이유는 흔히 접할 수 있는 휴지조각 등은 그나마 안정감을 주는 편안함의 버려짐이라면, 빈틈이 없을 정도로 바닥에 ‘던져진 것’들은 온통 ‘미술’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비밀스러워 보이는 한쪽 구석의쇼파와 책상은 ‘던져진 곳’에서는 조금 벗어나 보였으며 작가는 그리로 인도했다.

‘절대공개사절!’이라는 아틀리에에 영광히 초대된 것과, 대접받는 차한잔에 위로를 삼으며 감정의 노출을 최대한 은폐시킬 수밖에...

 

벽면에 보여지는 작품들은 [인물의 등장]이라는 점에서 씨氏의 예전 그림과 커다란 변화는 없었지만, 다소 어두워진 느낌이었다. 작품에 대한 ‘변화’의 질문에 “작년 개인전 이후로 점점 어두워지고 있어요. 반면 등장인물들이 조금씩 확대되고 있구요.” 짤막한 대답이었다.

“후져졌지요.”

예술과 소외, 비트겐스타인, 실존철학의 이해, 사르트르, 헤겔... 등등의 책이 꽂혀진 책장, 작품에서 전달되어지는 내용성으로 보아서 ‘후지다’라는 표현은 작가에 대한 첫느낌에 혼돈을 주는 어휘였다.

화구들로 가득찬 바닥, 책장, 그림 등에서 받았던 긴장감이 쉽게 풀어지지는 않았지만, ‘후지다’라는 그 말표현속에서 다소 감정의 이완을 느끼며 인터뷰는 시작되었고 작가와의 거리감도 서서히 풀어졌다.

“요즘 저의 작업들은 변화과정에 있어요, 예전의 밝고 화려했던 것에 비하여 어두워졌고, 등장인물들도 객관화되었다고나 할까요?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밝음보다는 어둠이 깊이가 있고 주관에 빠져있을때보다는 어느정도 객관화되었다고 좋은 쪽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요.

의도된 변화가 될지라도 저는 4-5년 주기로 달라진 그림들을 그리려고 노력합니다. 지금이 그 주기일 수도 있겠지요.“

[철학적인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작가의 예전 그림 경향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알고 있었던 터라, 그 변화의 과정과 작용했던 심리적 상태가 은근히 궁금해졌다.

“제게는 늘상 심리적 불안감이나 압박에 쌓여있어요, 예전에는 지금보다 더 심했었지요. 어렸을때부터 형을 존경하는 데서 오는 의도된 착실함과 책임감이 있었고, 항상 반항적이지 않는 착한 학생이었죠.

그 무의식의 흐름속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따라 다녔던 것 같아요.

그림을 그리면서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따른 죄책감과 갈등은 더 컸지요.

그러한 갈등은 대학교를 다닐 때 극에 달했었어요. 열정과 고행이 부족하다느 생각에 고통스러울때도 많았고 비생산적인 그림그리는 행위의 생산적 역할에 많이 고민했었지요.“

작가의 말을 통해서 ‘실내의 불안한 표정의 인물’이 바로 생각과 실제 행동사이에서 오는 부담감과 쫓기는 듯한 강박에서 표현된 결과였다는 것이 이해되는 것 같았다.

“또하나  제 생가가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것은 [신과 인간과의 관계]였어요. 제사고와 그림의 일관된 출발점은 [인간자신]이었고 아직까지 그 문제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제 사고의 흐름과 배경은 실존철학이었고 한동안 주제를 이루었던 [던져짐]그것은 ‘나 자신과 신과이 문제’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제 생각을 표현해본 거지요. 즉 神에 의해 무책임하게 던져진 인간과 그 나약함이 이 세상에서 무능력하다는 것과 그 결과는 ‘소외 疏外’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림의 방법상으로도 먼저 배경을 성실하게 그려넣은 후에, 상대적으로 인간의 표현은 얇고 드로잉(Drawing)하듯이 그려넣었죠.

인간의 존재가 약하고 미미하다는 것의 의도표현이 잘 전달되었는지는 몰라도.“

작가의 대학생활은 ‘나와 신과의 문제’,그리고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끊임없이 찾으려 했기에 세계를 보는 시각이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은 고통이었다고 한다.

“[던져짐]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주제가 [영웅]시리즈 였어요. 던져버린 인간에 대한 신의 무책임성에 항거하는 인간들. 니이체적 초인이라고나 할까요.”

‘저 사람은 뭔가 다르겠지’라는 관점에서 神에 대한 실망감을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전이시켜 영웅화시키려했던 것은 아닐까? 그것에 대한 또다른 한계는 이미 결과된 것이었다.

요즈음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평범한 인물들은 ‘초인적 인간’에 대한 동경에서 오는 실망과 포기의 결과이며 발전적으로 나와 내 주위로 확대된 시각과 사랑으로 표현되어짐이리라.

“그다음 저의 그림속에는 ‘실제의 나’와 ‘나는 누구일까를 생각하는 내’가 동시에 그려졌었지요. 이것은 한 화면속의 인물이라는 고정에서 벗어난 것이기도 하지만 나의 주변인물에 대한 애정과 그들이 저의 마음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죠. 예를 들면 근작의 그림에 제가 지도하고 있는 학생이 등장하느 점을 들 수가 있겠지요. 이것은 제가 갖고 있지 못하는 것들의 부분들이 주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확대되어 보여지며 그때 생겨지는 존경심과 애정을 ‘그림의 인물’로 표현해 보는 거지요.”

그가 말하고 있는 평범한 인물들의 그림들은 작업실 벽면을 둘러싸고 있어 쉽게 이해될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인물들은 예전의 실내공간이 아닌 자연을 배경으로 그려져 있었다.

“인간에 대한 관심이 저로부터 점차 주위로 확대됨과 같이 고민과 관념의 굴레였던 실내공간에서 밖으로 나가게 된 거지요. 예전에는 여행도 다니지 않고 사람들과 별로 접하지 않는 외골수 였었죠. 그런데 최근엔 점차로 개방되어 여행을 떠나 사진도 찍곤합니다. 그때 보았던 풍경들이 제 그림속의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하고요.”

현대성과 예술성의 원칙을 세워가면서 화면을 붙잡고 싸워왔던 실내에서의 작가 모습, 추상적 기법의 배경과 철학적 인물을 색과 구성감각으로 뛰어난 실내공간의 작품 시리즈를 했던 것. 그것들과는 달리 많이 오픈된 분위기의 작품들이 보여졌다. 고민과 그 해결을 위한 노력은 그동안 그려진 작품수를 통하여 능히 짐작할 수가 있었고 그의 지금의 변화는 그러한 과정에서 오는 필연적 결과임을 알 수 있었다.

“배 고프세요? 라면 끓여들일까요?”

라는 인터뷰 도중의 엉뚱한 질문과 혼동되었던 작가에 대한 생각들도 전개되는 대화를 통해서 해결되어졌다.

[사람],[사회속의 인간]을 조명하는 시각에는 변함이 없고, 다만 답답하게 느껴졌더 자신을 많이 풀어볼려고 시도하다는 작가의 말을 듣고 나서는 처음 접했을 때의 고정관념들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작업실을 벗어난 마로니에 공원과 전시장들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곳에서의 미술에 대한 느낌은 처음 작업실에서의 그것과는 달리 작가와의 공감대를 형성해 주는 친숙함으로 받아들여졌다.

[기계 문명의 발달과 대중적 인간속에서 참다은 인간성은 소외당하고 정신적 인간은 좌절과 절망에 부딪혀서 한계상황에 던져지게 되었고 현대미술은 수많은 개념과 실험과 이론의 노예가 되어 그 좌표를 상실하였다.]라는 학위논문의 구절에서 느껴지는 학구적이며 깊은의식의 소유자.

‘놀기 좋아하며 장난기 많다’는 스스로에 대한 평가를 받아들이며 그가 작품속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실재]와 [실재임을 의식하는 나]와 같이 어느쪽이 더 작가 권여현에 가까울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몇 개의 마로니에 잎이 떨어지기까지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찾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