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적 초상, 영혼의 비상을 위하여
지난 해의 첫 개인전(토갤러리,1988.7.11-7.20)이후 권여현은 그동안 연작으로 제작해 왔던 <던져짐>에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실존주의란 철학을 기초로 하여 인간의 근원적인 실존의 문제를 다루고자 했던 <던져짐>연작이 오히려 장식적인 차원에서 실존의 언저리를 배회하는 의사철학적(擬似哲學的)인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는 자각 아래 그는 스스로 구획해 놓았던 틀을 깨부수기 위해 고심하였던 것이다. 실상, 그의 <던져짐>연작은 실존철학의 몇 개념을 무리하게 형상화하려는 데서 오는 작위성 때문에 오히려 작품의 내용을 관념적인 차원에서 맴돌게 하는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화면속에 끈질기게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벽에서, 넓은 화면을 꽉 채우고 있는 배경에 비해 언제나 혼자 등장하는 인간의 내용과 동떨어진 제스추어에서, 실존적 고뇌의 흔적을 읽을 수 없고 장식적인 배경에서 찾을 수 있는 부조화스러운 관념의 그림자였다. 이런것들은 그의 작품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고 질적 수준을 고양하는 요소가 아니라 작품을 비우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변화의 낌새는 일단 긍정적으로 받아들일만 하다.
그러나 최근 그가 몇몇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들 -예컨대, 의식의 정직성(바탕골 미술관), 한국갤러리 개관기념전, 청년작가전(국립현대미술과)-등을 볼 때 그의 변화라는 것도 자신의 세계관에 대한 근원적인 반성에서 출발한 것이라기 보다 작품의 형식적인 변화에만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이글을 준비하면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과거의 작품이 지닌 문제를 스스로 토로한 바 있다. 그것은 대체로 필자가 앞에서 밝힌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자기비판이었다.
이러한 자기갱신을 위한 변신의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 속으로, 아니 그의 의식 속으로 관류하고 있는 것은 관념의 되새김, 즉 자신이 짧은 기간동안 형성해 놓았던 철학적 개념에 대한 집착과 그것에 안주하고자 하는 향수이자 욕망이다. 필자는 이러한 점을 그의 최근작을 비판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밝혀보고자 한다.
<던져짐>연작 이후 권여현이 다루고 있는 것은 <영웅>이다. 이때, 영웅이란 정신의 위대한 승리를 구현할 수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는 인간의 역사 속에 등장하는 존재가 아니라 권여현의 상상속에서 만들어진 존재다.
언젠가 그는 니이체의 초인에 대하여 필자에게 말한 바 있다. 인간의 삶과 죽음, 존재자체를 규정하고 구속하는 신적 존재를 거부한 영웅-그는 필자에게 영웅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였던 것이다. 그가 상징하고 있는 영웅이 초인이든, 정신적 승리를 구현한 인간이든, 아니면 신적인 존재이든 간에 그것은 과학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생각에서 나온것이란 점에서 비합리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어쨌든 그의 <영웅>연작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과거 그의 작품에서 보였던 인간의 소외나 피투성(被投性), 한계상황, 불안 등의 실존적 내용이 아니라 한 개인을 거대하고 육중한 무게로 짓누르고 있는 존재에 대한 그의 심리적 위축 혹은 강박관념이다.
그가 <영웅>이란 제명으로 제작한 작품중에서 첫 번째인 <영웅1>은 <던져짐>연작에서 <영웅>연작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의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분위기는 과거의 <던져짐>연작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벽으로 꽉 막힌 실내와 몇 개의 소품, 그속에 갇힌 개인으로서의 인간 등은 그의 과거의 작품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적인 장치이자 연출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두드러진 것은 화면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한 인물의 환영이다. 책상 위에 앉아 무엇인가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작가자신이라면 그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존재가 이를테면 영웅이다. 그가 표현하고 있는 영웅적인 존재의 모델이 그와 가까운 선배라는 점에서 이 작품의 표제는 다소 익살스러운 데가 있다.
영웅으로 묘사된 인물이 자신의 의식을 지배하는 존재임을 그는 주대종소법이라는 방식을 빌어 표현하고 있으나 이 작품에서 보다 중요하게 취급해야 할 부분은 거의 묵시적인 분위기 속에서 굽어보고 있는 초상이다. 비록 그가 작품의 표제를 <영웅>으로 붙였을지언정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그러한 신화적 내용이 아니라 그의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묵시적인 엄숙한 분위기인 것이다. 이런 점은 비단 이 작품에서만이 아니라 그가 최근에 제작한 일련의 작품 속에 내재한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영웅2>,<영웅5>,<무거운 날개>,<기다림>등의 작품이 그렇다.그것은 이 작품들이 내뿜고 있는 비의적 아우라에서도 잘 드러나는 것이지만 항상 화면 속에 등장하는 작가자신의 자화상에서 더욱 그러한 점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영웅이란 가상의 존재를 통해 그 자신의 비상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웅은 오직 그가 도단하고 싶은 궁극의 상태를 우의적으로 표현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영웅2>의 경우 지금 막 바닥으로부터 일어서고 있는 근육질의 건장한 육체를 지닌 영웅적 존재를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작가 자신의 모습은 오히려 영웅으로 향한 경외에 찬 것이라기보다 관조적이며 한편으로는 당돌하기조차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으 결코 영웅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무거운 날개>,<기다림>이란 작품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 자신이 비상을 위해 날개를 준비했지만 역설적이게도 날개의 무게 때문에 날지 못하고 좌절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나, 영웅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는 자화상에서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는 영혼의 비상을 위해 현실의 공간을 이륙하고자 한다.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어디인가? 그 궁극점을 향해 날아가려고 하지만 그의 육체는 이미 지쳐 있다.
그는 결코 자신이 그리고 있는 귀착지를 찾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육체적 한계 때문에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의 사변에 의해 만들어진 관념의 덩어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이 그의 최근의 변화가 무의미하게도 더 이상의 철학적 성장을 성취하지못하고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한계영역이다.
비합리성, 혹은 철학의 빈곤
권여현의 <영웅>연작이 과거의 작품과 다를 바 없이 비합리성에 함몰되어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우선 그가 기초하고 있는 철학적 입장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앞서 말한 바 있듯이 그가 작품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사상적 내용은 실존철학이다. 그러나 실존철학이 철학의 근본문제는 물론 인간의 삶의 구체성을 밝혀내지 못한 채 단지 실존의 주체성만 강조함으로써 주관적 관념론에 머물러 버리고 말았다는 점을 우선 지적해 두지 않을 수 없다.
실존주의는 합리주의에 바탕한 서구 부르조아 사회가 끊임없이 진보할 수 있으리라는 자유주의적 낙관론이 양차세계대전을 통해 여지없이 깨어질 수 밖에 없는 환상이었음이 증명될 즈음 서구사회에 풍미한 부르조아 휴머니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제 1차 세계대전이 유럽인들에게 가져다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들은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가 모순과 질곡을 은폐하기 위해 제국주의란 체제로 무장하고 식민지 개척에 나설 때만 해도 유럽중심주의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팽창은 필연적으로 세계질서의 재편성을 요구했고 그결과 파괴와 공포의 전쟁을 초래했던 것이다. 세기말적 무정부주의와 퇴폐주의의 휭행 속에 그들은 더욱 무력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실존주의는 이러한 역사적 질곡 속에서 형성된 철학으로서 그 철학적 태도는 기본적으로 비합리주의이다. 즉 인간 실존의 무목적성을 주장한 나머지 인간역사 발전의 제법칙을 단지 주관적인 차원에로 환원시켜 버린 것이다. 실존주의의 원천은 19세기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르고의 실존개념이지만 특히 ‘생의 철학’을 내세운 니이체의 사상을 이어받고 있다. 실존의 본질에 선행한다는 사상은 인간의 이성조차도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사회성은 극단적인 주관적 관념론에 의해 무시되며 오직 고독한 개인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이 부르조아적 개인주의의 한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무신론적 입장에 서 있는 싸르트르는 실존의 자유와 책임을 서로 결부시킴으로써 문학에 있어서 참여를 부르짓은 바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속에서 표현되고 있는 책임의 문제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직접적인 책임에 대해 다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책임의 문제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관념적인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고 있는 책임의 객관적 기준도 마련되어 있지 않거니와 더구나 만민에게 골고루 해당되는 책임 일반만을 거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추상적이고 무의미한 책임론일 뿐이다. 또한 실존주의가 인간의 삶의 구체성과 이 사회의 역사발전의 법칙을 해명할 수 없다는 점은 유신론적 입장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카톨릭 실존주의자 마르셀(Gabriel Marcel)은 지향성이란 개념을 내세워 예술의사랑은 하등의 판단없이 예술 그 자체를 수용하는 것이라고 단언함으로써 신비주의란 미궁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 것이다. 종교철학이 그러하듯 유신론적 실존주의 역시 인간의 실존을 형이상학 속으로 밀어넣어 세계의 변혁 자체를 부정한다. 인간의실존이 곧 원죄가 되는 이러한 추상적 사상은 서구 부르조아 휴머니즘 철학이 다다른 궁극적인 결론이란 점에서 인간의 삶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든 문제의 해결을 신에게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과 희망, 위안을 신에게 떠맡겨 버린다면, 인간은 여전히 무기력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가장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세계관이 되어야 할 철학을 비우는 것에 다름아니다. 신은 저기 높은 곳에 있고 인간은 여전히 형이상학적 고통 속에 방치되어 있다.
상상력과 현실의 파악
필자가 밝힌 이상의 논의는 서구 부르조아 철학 일반에 얽힌 관념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제기이다. 그렇다고 하여 권여현이 이러한 철학에 완전히 매몰되어 있다고 단언해 버릴 수만은 없다. 그는 오히려 철학적 사변에 의해서라기 보다 그가 체혐하고 있는 산업사회의 각종 시각이미지속에서 찾을 수 있는 여러 특징들을 자신의 회화 속에 적절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를테면 컬러 텔레비젼 수상기나 비디오 등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시각문화를 자신의 화폭 속에 담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는 전자오락기기를 통해 인간과 신의 관계(영원한 통제자로서의신의 형태도 없이 기기를 조종하고 있으며 인간은 그 기기의 모니터 속에서 철저하게 꼭두각시 놀음을 하고 있다.)를 표현하고 했다고 말한 바 있지만 필자에게 더 설득력 있는 것은 그의 이러한 논리가 아니라 작품이 가진 독특한 정서와 분위기이다. 그것은 가장 모범생적인 형식이면서도 후기 산업사회의 징후를 체험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것이다. 즉 그의 작품에서 요즈음 논의가 분분한 포스트 모던에 가까운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또한 필자의 심정적 판단일 뿐 권여현이 포스트 모더니즘 논리를 구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
최근 그는 미술사적 도상을 자신의 회화속에 도입하고 있다.<영웅5>란 작품을 보면 얌전하게 앉아있는 자화상 위로 그리이스 고전조각의 형상이 엄습하고 있는데 그는 이것을 신에 도전하는 인간, 즉 영웅적 의지의 표현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영웅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표출한것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지나친 억측일 뿐이다. 오히려 그는 미술사란 거대한 보물창고 속에 보존되고 있는 자료중의 하나를 단지 인용한 것에 불과하다. 그의 자화상위로 희미하게 떠오르고 있는 이 투사의 환영은 그가 만들어내 허구의 영웅일 뿐이다.
그렇다면 영웅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는 니이체가 말한 초인도, 지구를 떠받치고 있는 아틀라스나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프로메테우스, 초인적 힘을 소유한 헤라클레스가 아니다. 그들은 단지 시화속에서나 존재하는 가상일 뿐이다. 위대한 영웅이 위대한 시대를 창조하고 그것을 이끌어 간다는 생각은 이러한 신화속으로 인간의 역사를 내몰아갈 위험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 자체를 부정하느 신비주의자의 환상이자 역사발전과 진보의 법칙을 왜곡하는 것이다. 오히려 위대한 인물의 출현은 그 시대의 목적과 필요의 표현임을 깨달아야 한다. 즉 위대한 시대가 한 개인의 능력과 지도력, 천재성, 힘을 성숙시키고 발휘하게 하며 결실을 맺게 만드는 원동력과 기바, 조건을 재공하는 것이다. 따라서 권여현이 상정하고 있는 영웅이란 결코 출현할 수 없는 허구이며 나아가 현실의 역동적인 흐름을 은폐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그의 작품은 영웅의 기다림이란 의미구조에 의해 역설적으로 제약 당하고 있다. 자신의 예술적 상징과 성취를 위해 그는 이러한 신화의 꺼풀을 벗어던져야 할 것이다.
작품으로 향한 지칠줄 모르는 애착과 성실성,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는 자세를 잃지 않는 그의 태도는 분명 귀감이 될만하다. 그는 모범생의 전형인 성실함과 탐구정신을 겸비하고 있는 젊은 미술가이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이 그의 예술적 고양을 담보할 유일한 덕목이라고 볼수 없다. 그는 자신의 상상력이 펼칠 수 있는 가능성을 아직 제대로 찾지 못한 듯 하다. 유려하고 깊이있는 색감과 대상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세계관이 관념론적인 것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닐 수 없다. 관념론은 그의 재능을 소비하고 쇠잔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만약 그가 예술을 통해 현실을 적절하게 파악하고 그것에 대해 발언하기를 원한다면 그는 현실의 구체성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또한 세계를 단지 파악하기위해 세계에 대해 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혁시키기 위해 세계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그는 현실에 대한 예술적 실천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부단하게 검증하여야 할 것이다.
필자는 그와 대학생활을 같이 한 동료로써 그의 세계관의 진일보를 위해 대화할 것이며 그리고 그것을 기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