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의 의미-출구없는 공간 속으로의 침몰
그가 그리고 있는 이 공간은 출구를 찾을 길 없는 미로와도 같다. 매우 혼란스러워 보이는 이 미궁속에 그는 숱한 부호나 상징을 채곡채곡 채워넣는다. 그것들은 상호중첩되거나 해체되기도 한다. 화면을 오밀조밀하게 채우고 있거나 혹은 점거하고 있는 이러한 암호와도 같은 기호와 형사의 파편들이 어떠한 연관성 아래 상호 통합되어 있는 것인지 추적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이러한 혼란을 가중시켜 주는 허물(의복의 윤곽선)의 실루엣이 이 불가해한 공간 속에서 부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화면을 점유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혼란스러운 공간과 언제나 상관없는 듯이 무표정한 표정으로 나타나고(마치 어둠 가운데서 불현듯 출현하듯이)있는 인물이다. 그것은 대체로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거나 불특정한 사람 즉,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앉아 있거나 혹은 서서 무엇인가를 응시하고 있다. 이 응시는 화면으로부터 외부로 향해 고정되어 있다.
외부, 즉 화면 속으로부터 보는 사람으로 향한 응시의 시선은 마치<닫힌 공간>에서 금방 튀어나올 것처럼 두드러지며 비로소 이 작품의 화면을 지배하고 있는 구조가 이 시선에 의해 모아지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도깨비처럼 허공에서 떠돌고 있는 빈껍질로서의 또 다른 나 (저쪽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실체로서 작가자신을 형성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심연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작가자신), 산산이 부서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나를 가두고 있는 실내구조와 일상적 물건, 그것을 갈라놓고 있는 붉고 분명한 직선, 혹은 창살과도 같은 격자형구조, 이러한 구조 속에 감추어진 즉, 수없는 겹침에 의해 사라져 버린 형상과 색채는 오로지 이 응시하는 눈초리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그가 폭로하고 싶은 자신의 의식을 대변해주고 있는 듯하다. 그런 점에서 그의 이러한 일련의 작품은 폐쇄된 좁은 공간속에 유폐된 채 부조리하게 왜곡되어 버린 인물을 통해 인간의 실존적 한계상황을 표출하고자 했던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을 떠올리게 만든다. 베이컨의 작품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속박하고 인간성을 파멸시키는 보이지 않는 권력체계-제도,인습,인간의 생멸을 지배하는 법칙-등에 의해 짓이겨지고 무참하게 도륙당한 한 인간의 몰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는 반면에 그가 선택한 방법은 훨씬 관념적이고 자의식적이며 또한 미학적이기도 하다. 그는 인체를 왜곡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그린 인간은 정태적이라고 할만큼 공식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표현의 방식 또한 대상을 앞에 앉혀놓고 그려나가는 인물화에서 볼 수 있는 규범적인 방식에 충실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화면 역시 비현실적이고 부조리하며 응축된 자의식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베이컨이나 그와 비슷한 의식으로 작업했던 작가들 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다.
많은 미술가들이 자신의 작업에 대해 자기고백이란 차원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그의 작품은 자기고백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곧 자신을 중심에 놓고 세계를 파악하고자 하는 주관적인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자화상을 둘러싸고 있는 이 혼란된 공간 역시 작가의 세계관이나 인생관에 대한 의식을 노출시키고자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식이 기반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의식을 드러내며 또한 그것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고 파악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유지하고 있는 이러한 구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나는 두가지 방법으로 나를 본다.
첫째는 나를 둘러싼 거울상으로 나를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자신이 작은 벌레가 되어 내몸속으로 들어가 나자신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는 방법이다.
나 개인의 시간들을 Y축으로 한다면 그 Y축에 걸리는 최초의 강력한 기억들은 무엇일까? 그것들은 -학교에서 일어난 짧으 순간들, 깡통차기 , 고무신들, 어떤 여학생, 고무줄, 고향의 강물범람, 눈썰매, 강가의 송사리잡기, 착한 어린이에게 주는 머리쓰다듬기, 반장선거, 병원의 약품냄새 등등-수많은 단면이 이어진 연속된 역사이다. 그리고 공간에 해당되는 X축에 대응하는 요소들 -경상도 사투리, 서울대학교 운동장, 경남 합천의 교회, 압구정동의 화실, 뚝섬의 아파트, 조용한 작업실, 꽉 짜여진 프라이드의 운전석 등등-이 금방 떠오르는 나만의 공간이다. 이것들은 나를 그렇게 선택해야만 하는 개연성을 주고 있다. 두 번째의 바둑판은 나를 둘러싼 거울상의 조합들이다. 이를테면, 나를 교육한 많은 선생님들, 책들, 그리고 살아나가는 많은 방법을 가르쳐준 사회 현상들, 노동자들, 교회의 설교소리들, 부모님의 굵어진 손가락, 단군신화를 강조하는 소리들등 이 아주 작은 부분의 예들이다.
나는 내경험에 연관된 모든 정보를 그림으로 그린다. 이런 행위는 작품에 대하는 나의 태도,혹은 이 세계에 대한 나의 삶의 방식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나는 개인의 존재가 하나의 둥근 입방체 안에 거미줄 모양의 수 많은 매듭의 연결들과, 그 연결들의 방사체 구심점에 위치한 매듭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매듭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초월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고 만질수도 없고, 어떤 규정도 할수 없는 존재이다.
내 그림 속에는 아주 많은 매듭들이 나타난다. 정치적 폭력, 고문, 문화, 고대유적, 성, 사랑, 동성애,종교, 선교, 역사, 신비, 과학, 등 많은 정보가 그림속에 얽혀있는 것이다.
나는 내 작품을 해석하기 위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매듭을 일단 6가지 범주로 나누었다. 사회,종교,역사,과학, 욕망,사랑의 6가지가 내가 나눈 큰 매듭이다.
나는 이 6가지의 매듭에서 반사되는 편린들로써 자아의 의미를 추적하고 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과 사건들이 어떤 형태로든 나에게 영향을 미칠것이고, 그 영향의 길을 역으로 추적하면 자아의 모습은 나타날 것이다.
나는 그 추적장치로 깔대기를 생각해 냈다.
깔대기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연관성이 없는 사건들이 산재하는 혼돈의 세계와 논리적으로 정돈된 세계를 연결해주는 매개체로써 내 그림에 나타난다.
또 하나의 상징체인 얼굴도 그림의 중심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가장 예민한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 직면해도, 가장 빠른 시간내에 어쩌면 가장 정확한 판단을 해 내는 기적적인 컴퓨터로써의 얼굴은 자아가 매우 다원적이고 입체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내 그림에 혼재하는 사건, 상황들의 매듭과 깔대기
그가 자신을 형성하고 있는 요소로서 설정한 시간과 공간의 좌표는 요컨대 개인적인 시간의 연쇄, 혼자만이 경영해 나가는 폐쇄적 공간에 의존한 것임을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항상 그의 의식속에 순환하고 있는 기억의 인자들임에 틀림없으며 그것을 그는 <선택>하고 그 선택에 독자적인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즉 숨은 그림찾기처럼 감추어진 일상적인 물건들 예컨대 갓전등, 선풍기, 탁자와 의자, 칙칙한 어둠의 장막으로 둘러싸인 실내공간은 대상자체의 표상이라기 보다 그의 의식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더욱 적극적으로 지시하고 있는 것이 망령처럼 그의 뒷편으로 나타나고 있는 -혹은 사라지고 있는- 그림자이다. 그는 이 유폐된 공간의 문지방에 서서 자신을 응시한다. 따라서 그 응시하는 시선은 화면의 밖을 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조명적이란 점을 알 수 있다.
자기로 향한 이러한 성찰, 그 기억의 순환에의 집착을 표상하고 있는 이러한 작품에 대해 그는 <자아의 의미>란 표제를 달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 할 수 있는 장치로서 그는 의식이란 거울을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거울은 대상의 일면만을 반영하는 실제의 거울과 다른 것이며, 더욱이 외양이나 진상을 비쳐보는 것이 아니라 복잡하고 중층적인 내면을 탐색하는 일종의 도구이다. 즉 그물처럼 촘촘한 의식의 세계를 표상화하는 도구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완강하게도 한 방향으로만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더 많은 것을 비추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언제나 엄습하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그의 작품 속에서 폐쇄되고 단절된 그리고 의식적으로 쌓아올린 것과 같은 담장(출구없는 공간)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 유폐공간 속으로의 침몰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의 왕국이며 그속에서 그느 무소불위의 자유를 느낀다. 마치 어머니의 자궁속에서 느낄 수 있는 안락함과도 같은 안도감에 휩싸인 채 그는 그곳으로부터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한사코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속에서 뜨악하니 버티고 있는 저 인물의 무표정하면 듯하면서도 자신만만해 있으며 또한 긴장해 있는 듯한 시선은 작가의 의식 저변에 깔린 심리사태를 말해주는 듯하다.
자신이 점유하고 있는 공간에 대해서는 제왕처럼 자신감에 차 있으나 그곳에서 다른 장소로의 외출에 있어서는 겁먹고 있는 것처럼.
피그말리온의 전설, 형상에의 자기동화
그리이스 신화를 문학적 상상력으로 오비디우스가 번안해 놓은 <피그말리온>은 미술가들이 항상 추구해온 형상의 마술적 힘의 징표로 해석되고 있다.
오늘날 미술가들이 피그말리온과도 같은 욕망의 소유자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미술가의 손에 의해 제작된 어떤 것이 어떠한 대상을 표상하고 있는한, 그리고 그것을 통해 구체적인 대상을 투사하는 한 피그말리온의 전설을 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신화가 미술가들의 창조력의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종종 미술가들은 자신이 다루고 있는 재료나 매체에 자기 자신을 동화시키기도 하며 또는 자신의 작업 속에서 작가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에게 넌지시 일러주기도 한다. 화가들의 작업에 대한 상승된 신념은 종종 나르시시즘의 형태로 나타날 경우가 많다. 일종의 자기노출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징후는 그의 작어이나 사회적 활동속에서 분명하게 혹은 숨겨진 형태로 드러날 경우가 많다.
그는 자신에 대한 열렬한 애정을 사람들이 해독해 내기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그것을 작품의 복잡한 구조 속에 잠복시켜 놓는다. 모든 사람들이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에 매력을 느끼듯이 그는 이러한 잠복구조 속에 감추어진 자기애, 자신감, 우월감을 바라보며 만족해 한다.
그의 작품 중에서 특히 <밑에서...>란 표제를 달고 있는 작품은 이러한 의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화폭을 정방형으로 길게 연결한 이 작품 속에는 네 종류의 각기 다른 의상과 자세, 표정으로 서있는 자신의 자화상이 있다.
광활한 대지이거나 혹은 광막한 무의식의 심연-정신분석학자들이 자아(ego)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큰 형태로 한 인간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이드(id)와도 같은-이거나 그가 줄곧 표현해 왔던 폐쇄된 실내공간 속에서 그는 다른 자신의 모습고 무관한 듯 서 있다.
이러한 각기 다른 자신의 모습을 연결해 주는 매개물로서 그의 성장기의 사진과 자라는 과정에서 자시느이거승로 소유했던 물건들을 화면에 꼴라쥬하고 있다. 이미 여러번 덧칠했음을 암시해 주는 저 갈색조의 화면을 뒤덮고 있는 거친 붓질 속에서 희미하게 떠오르는 사각뿔과 모자를 뒤접어 놓은 것과도 같은 형상의 돌출, 그 밑에서 부유하고 있는 도룡뇽의 잠행(潛行)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 그것은 마치 해독하기 힘든 암호와도 같다.
화면을 수평으로 가르는 직선은?
이 작품에서 과도한 기호와 상징의 과도한 중복은 사라졌을 망정 그가 표출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해지고 있다.
즉 그는 정신의 승리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고자 하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이 작품이 고독한 자아에 대한 심리적 위축감의 표출인 것처럼 보일수 있다. 즉 그가 한동안 마치 운명처럼 상속받은 실존적 고뇌의 틀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위장장치에 불과하다. 이 고요한 침묵의 공간 속에서 네가지의 각기 다른 모습으로 부상하고 있는 자화상은 실존적 한계상황에 의해 삶의 조건을 구속 당하고 있는 자기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라 언제나 배반할 수 없고 신뢰하여야 하는 자신에 대한 신념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지금까지 그렇게 하기위해 부단하게 노력해 왔다는 징표로서의 과거의 기억들이 복합적으로 화면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화면 속에서만은 그는 자신의 정신적 순결을 마음껏 구가하고 싶어 한다. 그리하여 그는 마치 거울 앞에서 그 속에서 투영된 자신과 대화하듯 이 화면을 바라보며 마주보고 있는 자신으로 향한 사랑을 새삼 확인하고 있다.
더러운 승리보다 깨끗한 패배를.
아마 그는 화면 속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렇게 되뇌일 것이다.
한 동안 그의 화면에 잠복되어 있던 절대적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외경이 이제느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바뀌고 있으며 그러한 징후는 점차 농후해 지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는 숱한 허물을 벗기 위해 그러한 것을 열심히 그리고 있으며, 기름진 말의 허위를 드러내기 위해 언어의 흔적을 화면으로 도입하고 있다. 신이 사라진 공백을 그는 자신의 모습으로 채우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조심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행위가 그가 추구하고 있는 정신의 승리에 대한 완전한 보장을 담보해낼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마치 피그말리온이 그랬던 것처럼 자시느이 열망이 육화될 수 있기를 끊임없이 갈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