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적 자아와 그에 대한 은밀한 모반 - 권여현의 작품에 대하여

정준모 (큐레이터)


 

누구나 추억을 갖고 있다.

그리고 대개가 그 추억이라는 것이 적당히 미화되고 수정되어 사실에 기초하고 있지만 그것이 세상에 드러날때쯤이면 아름답고 세련된 표정을 갖게 된다. 그러나 추억이라는 것이 “누가 추억을 아름답다 했는가”라는 대중가요의 가사처럼 결코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우리의 추억의 대부분이 당시는 모르겠으나 매우 유치하여, 때로는 남모를 부끄러움에 휩싸이게 하는 그런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 추억은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혼자만의 독특한 체험일 경우가 허다하며, 그 체험의 상황에 다라 어제의 가녀린 풀포기가 오늘 억센, 갈대잎으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에 자신의 심의에서 가감되면서 “해질녘 뒷동산에 오르면 초가지붕 위로 저녁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마을 전체가 솔가지 타는 냄새로 가득하곤 했다”는 투로 드러난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내보이고 싶지 않은 추억의 레파토리는 한두 가지쯤 있게 마련이다. 그 은밀함 때문에 더더욱 혼자만이 되씹어보고, 자신이 아는 책갈피 속에 몰래 귀중하게 끼워놓거나 아니면 비밀스러운 곳에 숨겨놓고 가끔 혼자일 때 살며시 꺼내보다가도 인기척이라도 날라치면 화들짝 놀라 이내 시치미를 뚝 떼게 되는 그런 추억 말이다.

이렇게 장황하게 대중가요 가사까지 들먹이며 추억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다름아닌 권여현의 회화가 바로 그 자신의 유년기, 청소년기 그리고 청년기를 지나는 동안의 자전적(?)체험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추억들은 혼란스러움, 이중적 자아, 내밀한 유년의 아니면 사춘기쯤의기억, 일상속에서 그저 지나쳐 버리기 쉬운 소품들, 그리고 언제나처럼 등장하는 자신의 모습이나 자신의 주변 인물들의 모습으로 권여현의 화면을 통하여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들은 어떤 질서나 그것들이 있어야 할 곳에 딱히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저 부유하고 있으며 이러한 연유로 인하여 초현실주의의 화풍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들은 이미 우리의 관념 앞에 놓여있는 그러한 것들이 아닌, 그만의  세계 속에서 의미가 있는 그의 삶 중심에서 어느 무엇보다도 강하게 인상 지워졌던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그 하나의 무엇이 되었던’ 그런 것들이다.

이런 점에서 보는 이들은 상당히 거부감을 갖게 되고 그의 화면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된다. 그러나 다시 남의 비밀을 엿본다는 호기심으로 그의작품에 관심을 표하다 이내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임을 알아채고는 누가 볼세라 자리를 뜨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비밀스런 은밀한 추억을 권여현의 화면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어하게 되고 그러면서 권여현을 자신의 공범자, 또는 동업자, 아니면 자신만의 비밀을 아는 딱 하나의 목격자라는 점을 간파하게 되면서 그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다. 아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는 것이다.

즉 공범으로서 그가 입을 열지 않고 침묵을 지켜줄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며 완전범죄를 위해 그를 어쩌지 못하는 이유도 그의 경험, 추억과 공유하는 부분에 대해 동류애 같은 것을 느끼기 때문이며 이점이 또한 그의작업을 지켜보는 이들이 많은 이유로 작용하게 된다.

어렸을적 자신과 한반이었던 창백하면서도 예뻤던 여학생의 가방을 훔쳐 볼 때 밖에서 어쩌지 못하고 망보아 주던 권여현의 어정쩡한 모습을 미루어 짐작함으로써 코흘리개적 개구쟁이 짝궁의 모습을 떠올릴수 있는 계기가 되곤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단지 얼한 내밀한 음모의 수행과정에서 권여현은 충실하게 조연의 역할만 수행했을까.

아니다.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그 가방 속을 보고 싶었던 이는 다름아닌 권여현 자신이었으며 우연히 용감하고 씩씩한 녀석의 제안을 받게 되자 어물쩍 그의 제안에 동조하면서 드러내놓고 보지 못하고 은밀하게 보고 싶었던 그 가방 속 탐사를 즐겼으며, 망을 보아 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은 친구의 대담한 작전수행중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킴으로써 그 일에 참여자 이면서도 철저하게 자신은 방관자로 남아 있을 수 있는 여지를 챙겼던 것이다.

이상의 장광설은(픽션) 그의 작업에서 당장 눈에 드러나는 소재가 갖는 특성, 다시 말하자면 그의 일상사적 삶의 편린들이 보는 이들의 삶과 공유하는 부분이 많음으로써 항상 우리의 관심을 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함이었다.

그렇다면 권여현의 작업은 그저 자신의 생활 일상사를 화면에 드러내는 것에 불과한 것일까. 이제까지 그의화면에 표피적인 것만을 겉핥기한 것이라면 그는 그의 일상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인가를 살펴보자.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알 수 없는 힘에 의해서 어쩔수없이 밀려가는 자신에 대한 회의다. 사실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시시각각 무엇인가 선택하고 결정하면서 살아나간다. 하면 그 선택은 누가 하며 그 삶은 누가 사는가. 그것은 당연히 자신이다. 그렇다면 그 선택의폭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여기에서 권여현은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이 주체가 되지 못하고 언제나 밀려다니고 끌려나가야 하는 자신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인간으로서 갖는 스스로의 한계점의 극복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권여현은 화가이다. 이미 그 연배에선 남부럽지 않게 -그러나 사실 그도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을 터이지만 - 몇몇 공모전에서 수상의 경험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기대를 걸고 있는 이들도 많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불명확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공간 속에 끝없이 펼쳐져 있고, 시간 속에서 끝없이 생성되고 있는 삶속에서 그 중심에 서있는 자신이 그 생성과정에서 철저하게 배제당하고 있는, 주체이면서도 철저하게 방관자이어야만 하는 자신의 무기력함의 근거는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의 관심이 무엇인가 그를 내모는, 그 자신의선택 이전에 이미 지워져 버린 운명(?)이라는 것에 대한 의문은 당연한 귀결로 보여진다. 이런점에서 그의작업은 신비로은 , 아니면 무시무시한 괴력을 가진 인간의 일상을 지배하는 어떤 실체에 대한 의문인 것이며 그런 점에서 자신이 관여할 수 없는 초자아에 대한 집요한 탐구이다.

대상은 움직인다. 그 대상에 따라 역시 그에 대응하는 이도 그래야만한다. 이성은 무기력한 것이며 대상은 우리가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우리는 제공하며 존재하는 것에 대한 실체를 밝히기 위한 모반의 기운을 조성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반이라는 것이 속성상 기밀유지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그의 작업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어야만 한 것이며 이기주의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모반을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찬찬히 뜯어보고, 음미하며 계획하여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아주 하찮은 사물들을 통해서, 일상 속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모반의 씨앗을 틔워서 물을 주어 키워나가고 있다. 그러나 디-데이가 결정된 것은 아니며, 그의 성격상 계획만으로 끝나 버릴 가능성이 농후하기도 하다. 어쩌면 그는 그저 이러한 모반의 기운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오늘이라는 사회가 <후기 산업사회>에 돌입하면서 이미 절대적인 것들에 대한 신념을 상실해 버린지 오래이다. 기계적인 처리와 생물학적 결정론에 봉착한 개인은 그가 활동하고 사고할 영역을 점차 상실함으로써, 발전을 거듭하는 산업이 적어도 실리적인 면에서는 진보, 발전이라는 개념이 합리적인 가설이라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지만 이것이 배태한 정치적 사회적 긴장감들은 사람들에게 근본적인 도덕의 유실로 나타났고, 그 과정에서 개인은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계획국가나 전제국가에서 처럼 자신의 뜻과는 관계없이 배치되고, 그곳에서 주어진 임무에 봉사해야만 하면서 사고의 기능이 거세되고, 가슴이 도려내진 채로, 손만으로 서야만 했다. 이러한 오늘의 상황을 어빙 고프만은 그의 [모형분석]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진단하고 있다.

“실제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은 그 자체가 모형들의 한 기능이고 그 모형들은 일종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삶이 예술의 모방이 될 수 없을지 모르나 일상행위는 예의범절을 따르고 있으며, 전범적인 형태들에 대한 동작이고 이러한 이상들을 처음으로 인식한 것은 본성이라기 보다는 가장에 속한다.”고. 그리고 권여현 자신도 이점에 동의한다. 그 껍데기, 가장의 외투를 마치 뱀이 허물을 벗어 버리듯 벗어 던지고 진정한 자아의 실체를 보고자 한다.

스스로도 볼 수 없는 자아의 실체 -사실 사람들은 평생 자신의 코끝조차도 볼수 없다.-를 거울에 비추어서라도 보고 싶어한다. 이것은 그의 작업의 주된 모티브가 되며 그를 못내 괴롭히는 실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자아의 실체는 거의 언제나 그의 화면 중앙에 자리한다.  그것도 대개는 그의 유년의 모습으로 말이다. 화면은 온통 자신의 기호로 화한 일상의 사물들이 서로 투사하거나 부유하면서 서로 교차하는 혼돈의 와중에서도 아주 의젓하게 흔딜림없이 이러한 혼란과는 무관하다는 듯 무관심한 표정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그의 모습은 이미 그가 아니다. 그는 그저 우리가 거리를 거닐다 흔히 만날 수 있는 너나 나의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설혹 그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보는 이들은 자신의 모습으로 치환시킬 권리가 있는 것이며 그럴 때에야 비로소 그의 작업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의 실마리를 잡게 된다. 그리고 이렇듯 주체적 자아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 화가로서의 치밀한 그물을 펼쳐 놓는다. 화면에 깊이와 공간감을 더하기 위해 사용하느 수직선, 사선같은 것들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