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현의 작업을 이야기함에 앞서 우리가 주목해야될 부분은 그가 젊은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적 자세가 진지하고 성실하며 무엇보다 작업의 양이 많다는 점에있다.
사실 젊은 청년작가들에게 어떤 기대와 가능성을 걸고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오는 실망은 생각보다 크다. 그것은 작업실의 여건이 어떻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작업의 양이 대개 기대에 미치 못하다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권여현은 신뢰를 갖어도 좋을만한 작가이다. 그의 동년배들에 비한다면 믿기 어려울만큼 작업의 양이 많은 까닭에서며 그것은 그의 본격적인 활동기간(6년남짓)을 염두에 둔다며 그냥 작업에만 전적으로 매달려 왔던 사람이 아닌가 할 정도로 놀랍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업의 우선적인 특징도 바로 그러한 점으로부터 출발되고 있다. 이를테면 그 붓의 연습량으로부터 오는 일련의 수공적인 숙련성과 더불어 어떤 밀도가 두드러져 보인다는 점이 그것이며 여기에 따른 화면의 충실도와 자신감을 통한 적극성은 역설적으로 화면을 보다 자유로운 표현공간으로 환치시키고도 있다. 실상 권여현이 그의 화면에 등장시키고 있는 테마는 애당초 실험적이거나 새로운 유행성의 무엇이지는 않다. 어쩌면 지극히 일상적이고 개별적인 자서전적 표현의 한 단편일 따름이다. 그것은 왠만큼 개별성을 두르는 작가라면 한 번쯤 관심을 기울여 볼 여지의 테마이며 거기에 별다른 의미를 부가시킨다면 현대사회의 기계적이고 조직적인 삶의 양성속에 점차 소외되는 인간의 내면적인 방황을 언뜻 얘기하는 그러한 것이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화면은 우리로 하여금 한순간만으로 눈을 뗄 수 없는 어떤 시각적인 흡수력과 동시에 다층적인 복합성을 지니는 그러한 것이기도 하다.
도대체 어디에 그와같은 매력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그러한 테마상의 의미보다 그것을 화면에 쏟아내는 그 표현상의 방법론에 어떤 비결이 숨겨져 있는 듯 보인다.
사실 권여현은 학창시절, 한 교수로부터 그림을 너무 답답하게 그린다는 충고아니니 충고를 받을만큼 순발력이 없는 체질의 작가로 보이기도 했다. 젊은 작가들이 그 젊음을 빌미로 보다 새롭고 실험적인, 말하자면 시대적 유행성에 발맞추는 속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이 일반적 추세인데 비해 그는 구상회화의 기본적인 요소에 오히려 충실했던 작가였었고 그것이 지금의 작업에 이어져 보다 밀도 있고 탄탄한 작업을 만들어 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구상회화의 기본적인 요소에 오히려 충실했던 작가였었고 그것이 지금의 작업에 이어져 보다 밀도있고 탄탄한 작업을 만들어 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기본적 요소를 단순하게 작업의 내용으로 밀착시킬만큼 상투적이고 안일하지도 않다. 그는 오히려 구상적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만큼 복합적 시각에서 자신의 세계를 자전적으로 펼쳐 나갔었다. 그리고 그 자전성이 테마에서부터 그 표현어법과 매재에 이르기까지 신선한 방법론으로 종합되어 기묘한 화면을 창출해내는 매력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실상 그는 스스로의 자아를 끊임없이 되새기며 현실의 세계와의 교감을 독자적인 방법으로 터 놓고 있다. 그것은 특히 현실의 자각적 존재로서의 인간존재를 그 본질에 대비시켜 등장시키는 것에서 읽어 볼 수 가 있는데 그 인간의 조건들을 시각적 차원에 위상시키는 것이 바로 그의 작업이다.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특정한 상일수도 있고 그냥 일상적인 상일 수도 있다. 때로는 자기 자신의 상이 등장할 때도 있는데 그것들은 언제나 부조리한 표정과 상황속에 등장하며 그 표현어법도 어딘가 모순적인 구성을 염두에 둔 것들이다.
말하자면 그의 화면은 현실과 내다보는 자아의 고독한 방황과 의식밖에 스스로 존재하는 현상을 서로 뒤엉기게하여 한 개체가 영속적이고 무한정한 시간과 공간속에서 어떠한 의미로 참여하고 있는가를 자유롭게 서슬하고 있다는 말이며 우리는 이러한 혼돈을 바라보며 비로소 인간존재의 형재적모습을 일련의 한계상황아래에서 개명하게도 된다는 말이다.
그의 화면에 무작위적으로 등장하는 인물과 그 실루엣 그리고 거울, (그것도 역사성을 은연중 띄게 된다.) 소용돌이의 기호, 격자무늬의 X.Y축, 그리고 색의 점묘적 혼합의 일루전 등은 바로 그 러한 요소를 읽고 확인해 볼수 있는 실마리라고 할 수 있고 건작에 있어서의 이 무작위적 전개는 더욱 가속화되어 하나의 또다른 자율적 화면의 창조성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볼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