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10.6 - 15
이번 전시에서 권여현이 보여주고 있는 작업들의 평면처리는 예전의 도상 구성 및 표현과 비교해 획기적인 변화를 보여줬다고 말하기 어렵다. 자전적이고 일상적인 요소들을 자동기술적으로 배치한다든가 주관적인 공간 이동을 강조하는 점, 빈번하게 사용해왔더 상징적 형상들과 동서양의 역사적 인물들을 도상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짜이게끔 하는 구성능력, 표면의 활달한 덧칠하기 등은 과거에 그가 해왔던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파악될수 있다. 여기에서 그의 주된 관심사는 이차원의 평면만으로는 부족했더 점이 문제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작품 속에 스며있고 짜여있더 시간.공간.자아의 세 축을 자연스럽게 해체하여 여러방식으로 평면 밖으로 돌출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이러한 새로운 방법은 <벌집>의 경우처럼 화면 위의 감각적인 덧붙임이라는 돌출의 가벼운 흔적에서 시작하여, <날개>와 <물고기 사람>과 같이 극다적이며 전위적인 돌출로 끝난다. 그 중간에<엄머니의 세계>와<물 맷돌>같이 새로운 돌출의 의미론을 비교적 쉽게 일러주는 작품도 있다. 하지만 캔버스라고 하는 현실 밖으로 나가보려는 대담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평면의 현실 안으로 귀환하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출구와 입구를 따로구분하지 않은 태도에서 볼수 있듯이, 그에겐 안과 밖에 대한 구별이 없으며 이에 따라 이원적인 대립이 없는 兩價性의 세계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가장 동양적이며 동시에 가장 서양적이라는 젼혀 상반된 문맥을 한 도상에서 보여 줄 수 있는지도 모른다.
몇몇 평자에 의해 지적되어 왔듯이, 그의 작업세계가 인간 실존의 잠언적 진술을 기초로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다. 하지만 그는 이 세상에서 죽음이란 곧 삶의 끝이라고 쉽게 믿어버리는 비관적 현실주의자로 보이지 않는다. 또한 이 세상의 무의미성과 싸워야 한다는 신념의 표출이 도상 곳곳에 녹녹히 배어 있지만, 그곳에 자신의 세계관을 억압적으로 내세우지 않는다는 점에서 겸허한 한 자유주의자의 초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이 지점에서 함께 암울한 한 시대를 거쳐왔던 동시대의 과장된 리얼리즘과 갈라진다. 그곳에서 그는 유연하게 흐를 수 있는 젊은 물길을 파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