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현은 컬러 텔레비젼 세대의 감각을 잘 반영하고 있는 작가이다. 컬러 텔레비젼은 현실의 파편들을 조합하여 그속에 특정한 의미가 내재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설득함으로써 사람들의 시선과 의식을 유혹 속으로 끊임없이 빨려들도록 유인하는 강력한 문화산업매체라고 할수 있다. 즉 그것은 파편화된 이미지를 시간이란 흐름속에 끊임없이 분사함으로써 마치 통합된 세계의 삶의 총체성을 약속해 주는 것처럼 최면을 걸고 있다.
권여현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방식을 나는 바로 컬러 텔레비젼의 시각이미지 생산구조란 것과 연관시켜 보고자 한다.
일단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라면 그것이 과거의 것이라 할지라도 그의 조준권 내에서는 현재로 되살아나고 해석해야 할 그 무엇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품 속으로 알레고리적 이미지란 적절히 각색된 이미지로서 발명된 것이 아니라 차용된 것이며, 작가는 알레고리에 대해 문화적으로 통용되는 의미를 주장하면서 자신은 그런 의미의 해석자로 자처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혼란을 유발하는 것은 거의 무차별한 그의 포획에 있는데 이미지들간의 불연속적인 병치와 해체, 기호와의 절충적 결합이란 구조를 이루고 있어 어느 평론가의 지적처럼 ‘기표의 유희’란 비판의 표적이 되고 있는 요인인 것이다. 컬러 텔레비젼이 가상과 현실이 서로 교차하는 접점에서 자본과 기술을 동원해 온갖 파편화된 이미지들을 의사통합적 방식으로 끊임없이 제공해 주는 것이라면 권여현은 사적차원에서 자신이 획득한 이미지를 관리하고 있다.
<어머니의 세계>란 작품 속에서 우리가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형상은 서로 상관없는 이 인물들이 붉은색의 윤곽선으로만 나타나는 인물과 화면에 부착된 ‘물.맷.돌’에 의해 불안한 친근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 여백들사이로 파고든 원색의 타원형과 깔때기 마름모꼴의 도형이 여전히 서로 상관없이 배열되어 있다. 이러한 기술記述만을 놓고 볼 때 그가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가 매우 모호하며, 각각의 이미지는 의미의 위계로 볼 때 기표에 가깝다. 더욱이 병렬관계적으로 제시된 이미지들은 결합의 필연성을 상실한 채 구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개별형상의 특수성 또한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차용된 이미지(니체,이광수 등)들이 단편적이고 간헐적이며 혼란스러운 것이라고 할지라도 어머니를 통해 이세상에 태어난 나 (붉은 윤곽선으로 표현된 작가자신)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존재로 여기에 있으며 생물학적 근친인 어머니는 물맷돌-이 도구는 우랄 알타이어족에게서 발견되는 유산이라고 한다.- 이란 문화적 근친과 조우함으로써 나란 존재가 형성된 그 배경을 드러낸다. 이것이 이 작품을 알레고리적 해독을 요구하는 요소라고 나는 생각한다. 비유기적 이미지들이 하나의 근원적 풍경으로 몽타쥬되고 이미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제시되고 있는 또 한 작품으로 <아버지의 아들>이 있다. 부자의 근친성을 확이하고자하는 이 설치작품은 무명의 화가가 그린 부모의 초상화들과 군복무 시절 아버지가 다루었던 물품들이 복고주의를 은근하게 자극하면서도 사진이란 일차텍스트 위에 또 하나의 텍스트(시간의 흐름에 의해 잊혀져간 어린 시절의 기억을 복원하는 작업으로서 과거와 현재의 몽타쥬)를 중첩함으로써 이 작품 역시 알레고리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권여현에게서 알레고리는 하나의 기법이자 태도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과거의 그의 실존적 작품과 최근의 작품을 구별짓는 하나의 표지라고 할 수 있으나 앞서 말한 과도한 의미부여에의 집착이 그의 작업의 의미를 오리무중속으로 끌어들이는 요인일 뿐만 아니라 주관적 관념의 방언에 끊임없이 열중하도록 만드는 -결국에는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이유임을 다시금 강조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