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물질 시대의 회화에 대한 인문학적 통찰 : 권여현의 <일탈자> 연작

김보라 (예술학/미술비평, 홍익대학교 초빙교수)



1. 프롤로그

그림 앞에 선다. 밝고 맑은 화폭에 젊은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주로 숲이나 바다를 배경으로 등장하는 그들은 거리낌 없이 자유로운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히피 스타일 차림새, 수영복, 누드 혹은 반라의 상태로 일광욕을 하거나 해양 스포츠를 즐긴다. 롤링스톤스 티셔츠를 입은 장발의 청년이 보이는가 하면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크롭티, 후드티 복장의 인물도 있다. 화면의 높은 곳에 자리한 수평선 혹은 지평선은 과감한 붓질과 어우러져 그림 전체에 활기를 더한다. 반복적으로 출현하는 인물이 있으며 이전 작업에서 빈번하게 나타났던 신화와 미술사 도상도 보인다. 이를테면 오필리아와 디오니소스, 브뤼헐의 <장님을 이끄는 장님>, 폰토르모의 <십자가에서 내림> 등이 삽입되어 있다. 대형 회화에서 여러 다양한 시공간의 이미지가 병치되는 혼종성의 화면이 두드러진다.

 

이처럼 익명의 청년들이 등장하는 회화가 있는가 하면, 니체, 푸코, 들뢰즈, 크리스테바 등 한눈에 알아볼 만한 유명인의 초상화도 보인다. <내가 사로잡힌 철학자들>(2020)이라는 제목의 연작으로, 인간 이해를 향한 권여현의 지적 항해에서 부표 역할을 해온 여러 사상가를 그린 것이다. 원시림에서 산, 바다나 계곡으로, 배경이나 공간 속 인물들에서 개별 인물의 제스처 자체로 좀 더 집중하고 있는 점이 최근에 그려진 작업에서 확인되는 변화다. 코로나 이후 일상의 많은 부분이 디지털 세계로 이동했듯, 권여현의 회화는 ‘눈먼 자’ 연작에서 ‘일탈자’ 연작으로 서서히 옮겨간다. 전체적으로 두드러지는 유동성의 이미지가 폭포와 계곡이 부각된 풍경과 결합한다. 분홍, 밝은 청색과 녹색, 황색이 두드러지는 화면은 예전에 비해 더욱 밝아졌으며 묽게 사용한 물감은 흐르거나 때로는 흩뿌려진다. 애초 두텁게 올라갔을 물감이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쪼그라든듯한 흥미로운 형태가 부분적으로 눈에 띄기도 하나, 전체적으로는 얇고 가벼운 터치가 리듬감있게 펼쳐지는 화면이다. 작가는 한마디로 회화적 에너지가 분출되는 세계를 제시하고 있다.

 

권여현은 2020년 후반부터 ‘일탈자’ 개념으로 작품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전시 《낯선 숲의 일탈자들(Deviators in Heteroclite Forest)》(2021.2.17.-4.25), 《권여현: 현대의 신화(KWON Yeohyun: Myth Today)》(2022.7.8.-8.13), 《일탈자의 장소(Uncanny Place of Deviators)》(2022.12.28.-2023.1.9) 등을 통해 선보인 일련의 작업에 초점을 맞추면서 나는 이를 <일탈자> 연작이라 부르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햇수로 4년째 코로나 바이러스와 더불어 살아가는 일상이 계속되고 삶의 많은 부분이 온라인으로 옮겨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가 <일탈자> 연작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특히 이 연작을 시작한 2020년은 코로나 원년으로 방역 목적의 거리 두기와 수많은 사회적 통제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이다. 가는 곳마다 발열 체크와 손 소독이 의무였고 동선 제한과 격리가 실시되었으며 물리적 공간에서의 만남 대신 온라인 미팅이 이루어졌다. 현실은 쪼그라들고 사이버 공간은 점증적으로 비대해지고 있는듯한 세상 속에서 권여현의 작업은 오히려 회화가 지닌 매력을 극대화하고 있다. 회화라는 전통 매체의 특수성을 통해 인간의 감각 회복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모든 것이 비물질 세계로 이동하고 있는 가운데 물성과 신체성을 강조한 작품을 제시하는 그의 시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가상의 신체가 물리적 신체를 대체하는 경향 속에서 이 자체가 일탈인가. 작가가 회화 언어로 청년문화와 대항문화, 하위문화 이미지를 펼쳐내고 있는 배경은 무엇일까. <일탈자> 연작을 이전 작업과 연결하여 맥락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2. 권여현의 인문학적 회화  

“인간성에 대한 감각은 아직 나를 떠나지 않았습니다.1) 미술사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가 자신의 책 첫머리에 인용한 칸트의 말이다. 파노프스키는 죽음을 9일 앞둔 시점에 주치의를 맞이했던 칸트의 일화를 들려준다. 말년의 철학자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기력이 쇠한 신체를 애써 일으켜 세워서 의사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면서 위의 말을 남겼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칸트가 언급한 ‘인간성’이란 무엇일까. 파노프스키가 설명하고 있듯, 칸트에게 인간성이란 예의 바름과 공손함 이상을 뜻했다. 그것은 보다 깊은 의미를 지닌 것으로, 영원히 살 수 없는 인간의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 지키고자 했던 가치였다. 물론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 칸트와 21세기 포스트휴먼을 논하는 우리 사이에는 커다란 시공간적 간극이 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지켜야 하는 인간성의 가치는 과연 무엇인가. 칸트가 말한 인간성과 우리가 말하는 인간성 사이에는 어떠한 연속성과 차이가 존재하는 것일까. 전 세계적 전염병을 겪으면서 서구 근대의 지반을 형성해온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성이 일고 인공지능, 알고리즘, 휴머노이드 로봇이 회자되고 있는 지금, 우리는 다시 인간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권여현의 예술은 인간 정신과 역사를 향한 장대한 오디세이아다. 1990년대 초, 작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인간의 본질에 이르는 길은 수없이 많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 그 구심점을 향하여 내가 걷지 않은 또 다른 길을 찾아 접근을 시도할 것이다.” 지난 40년 동안 창작 활동을 이어오면서 한국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대표 주자로서 회화, 사진, 영화, 퍼포먼스, 설치 등 다양한 실험을 전개한 그의 예술 중심에는 항상 인간이 있었다. 자아와 실존에 관한 연구로부터 시작하여 정체성, 관계, 사회, 인간 본성을 이해하기 위한 끝없는 탐색으로 이어진 작업은 정신분석학, 신화, 역사, 철학적 담론과 자연스럽게 만난다. 권여현의 예술에 대해 여러 차례 글을 썼고 오랫동안 그의 활동을 지켜본 윤진섭, 최태만 비평가가 이미 적확하게 밝힌 대로, 다채롭게 펼쳐져 온 그의 작품세계에서 중심추 역할을 하는 것은 회화다. 퍼포먼스, 사진, 영화 등이 회화적 실천의 일부인 것이다. ‘인간’과 ‘회화’. 권여현의 예술세계를 조망하며 나는 현대사 속에서 끊임없이 의심받고 도전받아왔다는 공통분모를 지닌 이 두 가지 거대한 개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작품세계 전체를 통칭하여 ‘인문학적 회화’의 여정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일찍이 회화가 학문이 되고 예술의 최고 위치를 점하게 된 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일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은 바로 알베르티였다. 그는 저서 『회화론(De pictura)』(1435)에서 회화야말로 예술의 꽃이라고 평하면서 회화 예술의 뛰어난 경지에 도달한 이를 ‘또 하나의 신’이라 부를 수 있다고 쓴다. 당시로서는 파격적 발언으로 르네상스 시대 인본주의 사상을 토대로 가능한 주장이었다. 이탈리아 미술사학자 리오넬로 벤투리가 알베르티의 회화론을 ‘르네상스 시대의 대헌장(Magna Carta)’이라고 평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겠다. 그러나 알베르티나 다 빈치에 의해 모든 예술의 기원이자 과학의 원천으로 드높여진 회화의 현재는 어떠한가. 다매체 환경 속에서 매체는 어떠한 변화를 겪고 있는가. 오랜 세월 왕좌를 차지했던 만큼 수많은 견제와 공격의 대상이었는가 하면, 기후 위기나 환경 문제 등 소위 동시대적 이슈를 다루는 최근의 기획 전시에서 회화 작품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스펙터클한 영상과 사운드가 동원되는 설치작업에 비해 회화는 내러티브나 담론, 이목을 끌만한 역동적 상호작용, 몰입적 환경을 조성하기에 불리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말 없는 시’ 회화의 역할은 무엇일까? 권여현의 작업은 코로나로 재편된 뉴노멀의 현실 속에서 동시대 인간과 회화 예술에 대한 근본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3. 저항으로서 예술

권여현의 회화와 긴밀한 연관성을 맺고 있는 철학자이자 초상화 연작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는 들뢰즈가 강조했듯, 예술은 저항이다. 예술은 감각을 창조하는 활동이자 인위적 경계와 체계를 넘어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일탈자> 연작은 이러한 예술의 본질을 상기시킨다. 미술사를 통해 우리가 기억하는 예술가들은 일탈과 위반, 도전을 이끌어온 이들이다. 비단 예술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영역에서 역사를 추동한 힘은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투쟁과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에 주목하고 디지털 문명 전환에 대한 관심 속에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작가는 과거 대도시의 뒷골목을 채운 그라피티에 해당하는 것이 이 시대의 인터넷 공간의 밈과 짤 문화가 아니겠는가, 라고 말한다. 우리는 모바일을 통해 소통하고, 모든 것이 손안에서 실행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구절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시켰다는 스마트폰은 낭만주의 화가이자 시인 블레이크의 시적 상상을 현실로 구현한 셈이다. 수시로 울리는 문자 알림에 반응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새로운 정보 검색, 기록을 위해 누구나 우선적으로 취하는 행동은 휴대폰을 꺼내 드는 일이다. 일상의 모든 일에 접속이 필요하므로 이제 휴대폰 없는 삶을 상상하기 어렵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메타버스, NFT, 확장현실(XR) 등이 부상하고, 더욱 빠른 속도로 삶 전반이 모바일 전자 기기로 집중되고 있다. 캄캄한 새벽이나 밤길, 어둠 속에서 빛을 밝히는 것 역시 휴대폰이다. 이제 우리를 인도하는 빛은 모바일 기기의 불빛인 것이다. 마치 배면에서 빛을 내는 액정 화면처럼 밝아진 권여현의 회화는 이와 같이 디지털 기기로 수렴되는 동시대 시각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면 권여현이 <일탈자들> 연작을 통해 구현한 이미지들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언젠가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이나 잡지에 게재된 사진, 68혁명이나 청년문화, 히피 관련 인터넷 검색 이미지이고, 부분적으로 화가 자신의 이전 작업 속 모티프가 도입된다.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이미지 자료는 컴퓨터 작업을 통한 편집과정을 거쳐 캔버스로 옮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 작가는 “생각을 날 것인 상태로 정착”시키는데 주안점을 둔다. 주로 캔버스를 눕힌 채로 제작이 이루어지는데, 이는 묽은 채색이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도입된 과정일지 모르나,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지점이다. 캔버스를 수직으로 고정시킨 상태로만 그리는 방식과 분명히 다른 차이점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캔버스가 바닥에 수평으로 놓임으로써 화가의 시야나 자세에 영향을 미친다. 화폭은 화가의 몸과 더욱 밀착되고, 재료와 재료가 반응하며 생기는 움직임과 작가의 몸짓이 자연스럽게 결합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는 폴록이 자기 그림과 인디언의 모래 그림, 동양의 서예와의 관련성을 말하는 세간의 평에 대해 “의도하진 않았지만 아마도 원초적 기억과 열망에서 비롯했을 것”이라 답한 내용과도 연결하여 고찰 가능할 것이다. 다채로운 회화적 표현이 펼쳐지는 권여현의 작품은 물질의 생명성, 생성, 우연을 더욱 폭넓게 받아들이는 듯하다. 작가 스스로 ‘감각의 드로잉’, ‘회화적 그림’이라고 명명한 이 작품들에서 감상자는 말 그대로 회화의 매력을 한껏 경험한다. 제한적 틀을 벗어나고 매체의 가능성을 최대한 자유롭게 열어놓은 표현 과정 자체가 ‘일탈자’라는 주제와 자연스럽게 합일을 이루고 있다.

 

최근 전시 《일탈자의 장소》에서 회화와 함께 선보인 영상에는 일종의 강연 퍼포먼스(lecture performance)가 담겨 있다. 이 영상에서 본인 회화에 등장하는 이미지와 주제, 작업 방식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작가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어조나 제스처에 집중하다 보면 마치 일인극을 보고 있는듯한 느낌이 든다. 특히 영상 맨 앞과 뒷부분에서 장 폴 사르트르, 슬라보예 지젝, 발터 벤야민, 데이비드 린치 등의 초상화를 번갈아들며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다양한 분장과 연출을 통해 여러 정체성을 탐구하던 과거의 퍼포먼스 작업이 연상되는 것이다. 또한 역사적 인물 초상화 연작과 더불어 떠올릴 수 흥미로운 사실은 이미 1990년대 회화 작품에도 프로이트, 니체 등의 얼굴이 보인다는 것이다. 당시 큰 화면에 작은 요소로 삽입되었던 사상가들의 모습은 이제 감각적 화면의 단독 초상화로 옮겨지고 하나의 연작을 구성하고 있으며 작가의 퍼포먼스 소도구로도 활용되고 있다. 화가가 오마주를 표하고 있는 철학자들 역시 역사 속 일탈자다. 결국 그가 진정 전달하고자 한 것은 일탈자들의 모습이라기보다 그들의 정신일 것이다.

 

4. 스프레차투라와 ‘감각의 드로잉’

점과 선, 반복 모티프, 채움과 비움의 배치는 속도와 힘의 원숙한 조율, 전체적 구성 감각 없이는 불가능하다. 강연 퍼포먼스 속 작가의 설명을 그대로 옮기자면 “그저 무심한 듯 툭툭 쳐버리는 필법”을 구사했다고 한다. 그의 작업에서 드러나고 있는 수려한 붓질은 일필휘지의 경지나, 인터뷰 중에 작가가 언급하기도 했던 ‘스프레차투라(sprezzatura)’를 연상시킨다. 스프레차투라는 힘들이지 않는 태도를 뜻하는 것으로 16세기 이탈리아에서 탄생한 개념이다.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Baldassare Castiglione, 1478-1529)가 저서 『궁정인(Il Cortegiano)』에서 궁정 의례의 이상적 특징으로 열거한 것이었다. 이 개념을 통해 예술적 이상은 천부적 재능도 아니요, 알베르티가 강조했던 성실한 학습도 아닌 무엇이 되었다. 화가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 수 없도록 재빠르고 경쾌하게 그림을 그려야 했다. 이는 전성기 르네상스의 조형예술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이상을 말하는 것이었다. 즉 그것은 경쾌함, 능숙함 또는 탁월한 예술적 기량(Virtuosität)을 의미한다. 아름다움이 유발하는 황홀감이나 매혹과 연관된 스프레차투라는 아름다움이 비례, 질서, 통일감을 통해 완전히 설명될 수 없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 개념인 것이다. 완벽하게 구현된 형태만으로는 진정한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없다. 스프레차투라란, 물리적 아름다움을 넘어선 정신적 아름다움 또는 양자의 공존, 혹은 물리적 아름다움 자체의 내적인 부분으로 파악되어온 우아미와 연결되는 것이다. 이는 바로 <일탈자> 연작에서 구사되고 있는 자유로운 붓질에서 발현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권여현은 감각 형태를 ‘이중(dual)’, ‘삼중(triple)’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회화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형태를 온전히 갖추고 있지 않으면서도 형태로 받아들이게 하는 모호한 경계에서 작업을 펼쳐나가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면서 그는 매우 흥미로운 비유를 든다. 예를 들어 얼음장을 세게 누르면 깨어져 버리겠지만, 가만히 손을 대면 접촉면에서 약간의 변화를 느끼는 정도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내용은 하인리히 뵐플린이 『미술사의 기초개념(Kunstgeschichtliche Grundbegriffe)』(1915)에서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구체적 사례로 들며 설명했던 ‘회화적’ 개념과 연결하여 생각할 여지를 제공한다. 뵐플린은 ‘회화적(malerisch; painterly)’이라는 양식 개념을 통해 윤곽선이 분명한 닫힌 형식의 르네상스 미술과 열린 형식의 바로크 미술을 비교했다. 그가 선적인 것에서 회화적인 것으로 발전하는 미술사의 양식 법칙이 있다고 이야기한 것처럼, 탄탄한 데생력과 견고한 형태 이후에 유동적 화면이 등장하고, 이는 환영주의와 결부된다. 생략적 형태와 유동성의 화면은 생동감을 자아내고,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다. 뚜렷한 윤곽선보다 모호한 형태가 감상자의 상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은 뇌과학 연구로도 입증된 사실이다. 시각은 촉각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고, 미술사학자 버나드 베렌슨이 강조했듯이 “회화의 본질은 (…) 촉각적 가치에 관한 의식을 자극하는 것”이다. 권여현의 회화에서 투명한 피부와도 같이 말갛게 느껴지는 화면, 때론 살점이나 혈관처럼 느껴지는 물감의 흔적, 동양화의 선염(渲染) 기법을 연상시키듯 밑칠 없는 캔버스에 스며든 색을 본다. 힘 있는 선으로 과감하게 내리긋거나 흩뿌려지는 표현 속에서는 물소리가 들릴듯한 순간을 발견한다. 촉각적 시각성과 다중감각을 열어놓는 화면인 것이다. 100여 년 전 선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을 나누었던 뵐플린과 달리, 권여현의 회화에서 이분법은 무화된다. ‘감각의 드로잉’을 통해 선의 표현을 배제하지 않는 것이다.

 

5. 에필로그: 신체성의 회화, 그 동시대적 함의

이 글의 서두에서 권여현의 예술을 관통하는 두 개념으로 ‘인간’과 ‘회화’를 제시한 바 있다. 물론 이 키워드 자체가 시대착오적으로 받아들여질 소지가 있다는 우려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는 단지 기존의 인본주의적 시각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데이비드 조슬릿이 썼듯이, 이제 회화는 사회적 네트워크와 디지털 네트워크를 그 안으로 흡수하는 하나의 매체로 받아들여진다. 앤디 워홀의 팩토리 이후 대량 생산 시스템이 당연시되고 작품 보다는 이미지가 유통되는 동시대 미술 현장에서 작가의 수행성이 강조되는 회화는 어쩌면 가장 개인적이면서도 물성에 연결된 매체로 남아있다. <일탈자> 연작 역시 작가의 신체성, 그 현존의 흔적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앞서 살펴본 제작과정에서 알 수 있었듯이 그의 회화는 캔버스, 물감, 붓, 화가의 몸이 수평적으로 배치되는 하나의 사건이기도 하다. 밝고, 맑은 색채로 구현되는 유동성의 화면은 또 다른 행위자로서 재료들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감상자, 타자를 초대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보는 이에 따라 푼크툼, 주관적이고 순간적인 반응과 다양한 해석이 작동 가능한 화면으로 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푼크툼 개념을 처음 사용한 바르트가 토로한 바대로 천천히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사진에 비해 많은 정보가 빠르게 지나가는 영화에는 무언가를 덧붙일 시간이 없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건대 내러티브와 영상이 지배하는 동시대 시각문화 환경 속에서 회화가 갖는 힘은 직면적 경험을 통해 푼크툼의 순간을 제공하는 것,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단일 프레임의 멈추어진 화면이 어떻게 생명성을 담지할 수 있는가. 정치이론가 제인 베넷은 스피노자, 베르그송, 들뢰즈, 라투르 등에 기대어 생기적 유물론을 추구하며 인간중심주의와 생물중심주의를 비판한다. 그는 인간과 사물 사이 이분법이나 위계질서에 반대하고 수평적 존재론과 상호 얽힘, 다양한 배치를 강조하고 있다. 베넷은 “일상 세계, 즉 자연뿐 아니라 상품이나 다른 문화적 생산물에 대한 ‘감각적 황홀함의 순간들(moments of sensuous enchantment)’이, 우리 각자가 윤리적 원리를 인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윤리적 행위를 실제로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필요한 동기부여 에너지를 늘릴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에 동조하면서 동시대 회화의 역할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특정 시공간 속에서 회화 질료의 활력, 예술가의 움직이는 신체, 감상자의 에너지가 접합되는 감각적 황홀의 순간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림 한 점이 세상을 바꾸긴 어렵겠지만 누군가 회화를 통해 정동(affect)을 경험하고 생명성에 대한 감각을 느낀다면, 그리고 유사한 경험이 일상에서 계속 축적된다면 그 가치에 대한 인식과 실천을 이어가게 되리라.

 

전 세계적 전염병과 더불어 고립과 단절의 시대를 경험한 동시대인에게 ‘일탈’이라는 화두를 건네는 권여현의 예술은 감각의 회복을 지향한다. 기계는 인간을 닮고자 하고, 인간은 기계가 되는 현실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지난 세기 미술을 되짚어보자면 개념미술 이후 부활한 형상 회화, 신표현주의라고 불리는 회화의 복권에 대해 역사적 퇴보라는 강력한 비판이 거세게 일었지만, 많은 이의 반향과 재해석이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예컨대 독일의 미술비평가 이자벨레 그라브(Isabelle Graw)는 개념미술과 신표현주의를 상반된 미술운동으로 보는 이분법적 시각을 해체한다. 그에 따르면 양자는 화해 불가능한 적수가 아니다. 1990년대 말 권여현이 자아의 다원성을 실험했던 퍼포먼스 사진 전시에 대한 기억을 지닌 관람자이자 2010년대 회화 전시를 실견해온 감상자로서 써내려간 이 글을 마무리하며 나는 그라브가 어느 평문의 제목으로 붙인 ‘개념적 표현(Conceptual Expression)’이란 문구를 떠올린다. 긴 시간 꾸준한 열정으로 인간과 역사를 탐구한 권여현이 개념과 표현을 겸비한 예술세계를 펼쳐오고 있는 작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2020년 이래로 진행 중인 <일탈자> 연작은 가상과 현실이 혼재하는 시각문화 환경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과 함께 현대인의 억눌린 욕망과 감각의 해방, 예술 본연의 지향점을 재고한다. 나아가 코로나 이후 인간 중심의 질서가 재구성되고 있는 이 시대에 가장 오래된 예술인 회화를 통해 다양한 감각을 아우르고 물질 너머 비물질을 포괄하는, 확장된 인간성의 가치를 사유할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1] 파노프스키의 책에 나오는 다음 문장을 재인용. “Das Gefühl für Humanität hat mich noch nicht verlassen” - “The sense of humanity has not yet left me.” Erwin Panofsky, Meaning in the Visual Arts,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2, p. 1; 『시각예술의 의미』, 임산 옮김, 한길사, 2013, 35쪽.

[2] Verena Krieger, Was ist Künstler? Genie-Heilsbringer-Antikünslter: Eine Ideen- und Kunstgeschichte des Schöpferischen, Köln: Deubner Verlag für Kunst, Theorie & Praxis, 2007, p. 20; 『예술가란 무엇인가』, 조이한 · 김정근 옮김, 휴머니스트, 2010, 33-34쪽.

[3] Paolo D’Angelo, Sprezzatura: Concealing the Effort of Art from Aristotle to Duchamp, Columbia University Press, pp. 7-8.

[4] 에릭 캔델 지음, 『어쩐지 미술에서 뇌과학이 보인다』, 이한음 옮김, 프시케의숲, 2018, 128쪽.

[5] David Joselit, “Painting beside Itself,” October, no. 130, Fall 2009, pp. 125-134.

[6] Jane Bennett, Vibrant Matter: A Political Ecology of Things, Duke University Press, 2010, p. xi; 『생동하는 물질』, 문성재 옮김, 현실문화, 2020, 15쪽.

[7] Alexander Alberro and Sabeth Buchmann eds., Art After Conceptual Art, The MIT Press, 2006, p.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