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탁한 시절일수록 우리는 뭔가 새로운 정신과 빛나는 비전을 꿈꾼다. 2018년은 서구 사회에서 68혁명이 일어난지 50년이 된 해다. 전세계 곳곳에서 68혁명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가 벌어졌지만, 유독 우리 사회는 조용했다. 우리 사회가 경험하지 못했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이 분명 있었다. 우리 사회의 청년기에 놓쳤던 것들이 무엇일까? 과거로부터 전승된 좋은 것들이 아닌 모호하지만 현재의 새로운 것에서 출발하는 태도가 아닐까. 근래 권여현 작가의 회화를 관통하는 감각과 정신을 68혁명기의 청년들과 연결해보는 것은 흥미롭다. 작가의 그림에는 기성의 법과 제도와 관습과 도덕과 가치를 훌훌 벗어버리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내게는 그들이 곧 화면 밖으로 걸어나올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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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붓질에서 그림이 완성된다. 붓질은 한번으로 충분하다. 그것은 화가에게 꿈 같은 경지다. 그림과 합일하는 순간을 경험하는 사람의 내면에는 정체모를 에너지가 충전되어 넘쳐난다. 구체적인 외형을 갖추기 이전의 상태, 물감과 기름이 섞이며 하나의 형태를 형성하려는 순간. 가장 부드럽고 유연한 얇은 기름과 안료의 표면이 넓게 퍼지고 빛을 반사한다. 기름이 공기와 만나 경화되는 과정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 동안 명암과 채도의 균형을 맞추고 구체적인 형상과 기이한 형상이 재구성되어 간다.
권여현 작가의 인물들은 한 두 번의 터치로 색면이나 명암의 한 단계로 표현된다. 어떤 감정상태인지 그 표정으로는 알 수 없는 이미지다. 그러니까 감정이 일어나기 직전인지 아니면 격동하던 감정이 막 종료되어 사라지고 있는 상태인지 모호한 중간 지점이다. 형상의 있음과 없음 사이 어딘가에 머뭇거리고 있는 인상이다. 미완성이라기 보다는 열려있는 자유로운 완성의 상태처럼 보인다.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사라지면 어떤 원형적 이미지가 현상된다. 화면 위에서 대상은 미묘하게 형성되어 간다. 회화의 얇은 이미지 층의 감각적인 미적 효과가 우리의 내면에 가장 깊은 곳에 어떤 이미지를 형성한다. 여러 차원의 사물과 세계가 조응과 동조 현상이 물질계의 이미지와 내면의 비물질계의 이미지가 공명한다. 빛과 칼라와 그림자와 형태와 분위기와 뉘앙스가 하나의 이미지에 모여 있다. 권여현 작가의 화면은 수많은 결의 지층으로 구성되어, 마치 부드럽고 섬세하게 표현된 가장 깊고 무거운 이미지의 고고학처럼 느껴진다. 오랫동안 쉬지 않고 수많은 그림을 그려온 화가는 더더욱 그 에너지와 에너지를 담은 그림 이미지가 범상치 않다.
이미지를 구성하는 색과 빛과 조형의 감각적인 표현과 경험은 곧 감각 너머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조형적 유희와 쾌감을 훌쩍 뛰어 넘어간다. 그의 회화의 질료와 운동감과 색채와 명암의 세련되고 능숙한 테크닉은 곧 교묘한 형식이자 응축된 감각의 논리이다. 외계를 감각하는 것과 내면을 감각하는 것은 동일한 운동이다. 하나의 감각을 온전히 느끼기 전에 또 다른 감각이 엄습하는 감각의 파도, 감각의 연쇄, 감각의 길을 따라서 형이상학적 세계로 진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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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현 작가의 그림에는 개인의 기억을 넘어선 인류의 기억으로 가득하다. 기억과 망각, 시간과 장소로 가득하다. 작가의 이미지는 그 순간을 우리 눈 앞에 펼쳐보인다. 그 때는 몸도 마음도 자유롭다. 그곳은 파라다이스이고 유토피아이다. 깊은 상처와 고통과 함께 빛나는 기쁨과 사랑과 자유와 다정함이 넘치는. 영원히 현재에 거주하는 작가의 행위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 그리고 그 무의함과 덧없음, 기약없는 약속을 견디며 완전한 정착지를 찾는 이들의 기도를 담는다. 그것은 타고난 추동력이며 타율적이지 않은 자율적이며 자생적인 다가감이다. 불안과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우리는 그 인생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탐미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광기와 이성, 정신줄을 놓은 정신과 멀쩡한 정신이 팽팽한 줄다리기를 한다. 그렇게 그림은 결코 그림 안에 머물지 않는다. 그림은 그림 밖을 꿈꾸고 그림 밖으로 걸어나간다. 하나의 그림이 그려지는 과정은 화가 개인의 기원과 발생을 나아가 인류의 기원과 발생을 은유한다.
모든 세대는 저마다의 꿈을 꾼다. 그러나 그 꿈을 꾸지 못하면, 그 ‘때’를 놓치면 언젠가 그 때에 놓친 꿈들, 간과한 것들이 쓰나미처럼 엄습한다. 예술가들은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시대의 간극, 그리고 그 간극이 불러올 파국을 부드럽게 연결하고 치유한다. 예술가들의 이미지는 개인의 세계를 넘어 개인 밖으로 흘러넘친다.
이미지는 꿈이다. 대부분의 꿈은 잠이 깨면 허깨비처럼 사라진다. 꿈은 무의식의 거울상이며 그것을 반영하는 이미지들로 채워진다. 우리는 그렇게 꿈을 풍성하게 채웠던 내용들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 꿈을 꾸었다는 사실과 꿈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만이 분명하게 기억된다. 낮과 밤이 교차할 때 마다 인류의 망각과 기억의 기묘한 관계가 매일매일 벌어진다. 낮의 존재로서 인간은 밤의 존재로서 인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의식과 무의식의 두 얼굴이 인류의 얼굴이다. 빛과 어둠, 양과 음을 통한 정신의 연금술이다. 빛과 어둠 사이 또는 빛과 어둠의 공존이 곧 이미지의 터전이다. 예술가들이 각고의 노력으로 또는 타고난 재능을 발휘해 상상력을 표현하는 이미지야말로 상상력의 보고다.
플라톤의 동굴 밖을 나온 인간은 진정한 이미지(진실)를 목격했을 것이다. 동굴 속 벽 위에 재현된 이미지는 현실 속 대상이 아니다. 대상과 이미지를 설명한 말과 글도 그 대상이 아니고 이미지도 아니다. 작가가 화면에 형상을 표현하는 과정은 실재의 그림자가 만들어낸 선입견을 끊임없이 제거하는 과정이다, 거기에서 새로운 이미지가 샘 솟고 새로운 사물이 출현한다. 플라톤의 세계로부터 이탈한 자들도 냉혹한 진실을 마주했을 것이다, 땅위를 걷기 전 나무 위야말로 에덴동산이고 파라다이스였을지 모른다. 지상을 두발로 걷는 자들은 에덴의 탈주자들이며 이후 바벨탑의 거주자들이였을 것이다. 산과 바다로 떠나는 자들이다. 인류가 나무에서 내려와 첫 발걸음을 떼었을 때를 우리는 기억하지 못한다. 오랜시간 안전했던 동굴 생활도 망각하였다. 분명 있었던 사소하지만 거대한 사건이다. 그런데 대부분 인간의 발생과 기원, 본성을 규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우리는 기억하지 못한다. 망각된 것들이 가장 중요할 지도 모르는 것들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은 지금은 중요해 보이지만 사실은 역사적 시간 속에서 볼 때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들을 떠올려보려 애쓰지만 그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18세기 이탈리아 역사철학자 비코(G.Vico)는 시대를 거슬러 과거의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예술가들이 상상력을 발휘하려 애쓰는 것은 당연하다. 진실에 다가가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유년기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인류의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 저마다의 기억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분명 우리가 공통적으로 기억하는 빛나는 시간을 보냈다. 젊고 활력이 넘치고 온 몸에서 빛이 났다. 눈빛은 별처럼 반짝이고 목소리는 생의 사랑이 넘치고 현재의 기쁨과 미래의 비전으로 힘이 넘쳤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시기가 있었다. 어쩌면 현재도 그처럼 빛나는 시간임에도 우리가 잠시 망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언어로 사유하는 한 우리는 언어의 구조에 갇힌 채 자유로운 사유를 꿈꾼다. 그러나 꿈조차 언어의 형식과 문법으로 꾼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아주 조금이라도 언어의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는 현대에 갇혀 존재한다. 우리에게 과거와 미래는 결코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들 사이, 그 찰나의 순간에 어떤 이미지가 솟는다,
작가의 회화는 주술을 걸 듯 우리가 기억하고 동시에 망각하는 20세기의 추억과 경험을 온라인 네트워크 상의 밈과 짤처럼 반복하고 있다. 온라인 상에 증식하는 밈과 짤은 일상과 비일상,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 사이의 간극과 그 바깥을 반복의 유희로 일상화한다. 밈과 짤은 일종의 집단 무의식처럼 집단이 꿈꾸는 상태이다. 밈과 빨은 마치 유령처럼 두서없이 그러나 반복해서 매순간 언어와 문화에 포획되는 세속적 예술이 아닌 예술의 궁극적 무한성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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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현 작가의 작업은 우리에게 회화가 여전히 의미있는 공감과 미적 대화의 방식인지 새삼 느끼게 한다. 많은 회화 작가들의 감각과 의미를 수렴하고 종합하고 선별하는 오랜 시간을 지나 권여현 작가는 자신만의 고유한 감각과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권여현 작가는 철학적 사유와 회화적 표현 사이를 왕복하며 작업하지만 그 과정에 형성되는 이미지는 어떠한 것도 분명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재현하지 않는다. 다만 과거의 문명과 미래의 문명 사이를 유랑하는 사람들의 형상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을 연상시키토록 잘 혼합된 질료들이다. 논리와 논리의 밖과 모두 연결되어 리좀처럼 얽히고 설킨다. 하나의 이미지란 하나가 아닌 모든 것의 이미지이다. 원형적 기억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이미지의 기원은 언제나 현재의 감각과 생각보다 더 멀고 더 깊다. 텍스트와 텍스트, 무수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오랜 시간과 장소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다. 이미지는 근대적 의미에서 이성적이며 기하학적인 논리의 세계를 넘어선다. 날개달린 이미지는 철학의 외부와 내부를 자유롭게 유영한다.
화가의 관점과 철학자의 관점은 다르다. 작가는 화가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동시에 철학자의 태도를 쟁취하려고 한다. 그러나 결코 절충적인 모습은 아니다. 끊임없이 내적 갈등과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 화가와 철학자라는 두 자아를 동시에 키워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의 주요 키워드인 ‘리좀’적 사유와 실천이 곧 이질적인 두 관점, 나아가 더 다양한 분화된 자아들을 구성해나간다. 작가에게 한 개인의 의식이란 단지 하나의 의식이 아니라 민족 전체, 인류 전체의 의식을 전유한다. 하나이자 동시에 여럿이고 모두이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는 세대간의 깊은 대화를 회피해왔다. 개인의 내면에서도, 사회 공동체에서도. 신비주의의 탈을 쓰고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과정에 개인들간의 자유가 어떻게 충돌하고 어떻게 상호균형을 잡아가는지 미숙한 상태를 방기해왔다. 불과 얼마전까지도 침묵은 금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침묵은 나태한 것이고 부주의한 것이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인정하고 공감하는 무수한 대화의 시대가 되었다.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들은 권여현 작가가 오랫동안 회화에서 모색하고 추구했던 인간 존재의 본질 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하나의 결정체로 보인다. 텍스트와 이미지가 융합하는 작가의 작업은 마치 진리를 추구하는 새로운 유형의 그노시스트를 연상시킨다. 신비하게도 하나의 이미지가 모두를 담고 있으며 이는 마치 원형의 기억(신화와 같은)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이미지처럼 연출된다. 작가는 과거의 신화를 끌어들임으로써 현재와 미래를 새롭게 구성하는 일종의 트릭을 사용한다. 하나는 결코 하나가 아니고 마침내 하나 이상으로 나아가 전부가 된다. 신화 속 모티프에서 기원한 이미지와 현대의 삶에서 기원한 이미지가 사실은 모두 같은 것이다. 시간과 멀고 가까움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작가의 이미지는 의도된 것과 필연적인 것, 의도하지 않은 것과 우발적인 것들로 변화무쌍하고 풍부하며 활기 넘친다. 여러 시기와 단계를 거치며 쌓여온 확장과 응축의 과정을 농밀하게 내포한 이미지들이다. 작가의 이미지는 세상을 유희하는 어린 아이와 분노하며 도전하는 청년이 그리고 풍부한 경험의 중년인과 웅장한 고독의 노인이 모두 거주한다. 기묘하게도 너무 많은 사유와 너무 많은 감각이 공존한다. 초기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했던 깔대기를 통해 하나로 수렴하듯, 작가 자신이 청년기와 장년기를 지나 이제는 자신만의 완숙한 회화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선언하는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