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현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작업들은 지금까지 그가 보여 주었던 작업의 연장선에 있으면서 동시에 몇 가지 차별적 지점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하게 된다. 그 차별적 지점의 첫 번째는 작업의 소재 면에서 이전 작업과는 달리 인터넷을 통해 찾아낸 동시대 사람들의 모습과 표정이 담긴 이미지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전 작업에서는 신화와 철학 역사 등을 아우르며 심오한 무엇인가를 연상케 하는 이미지를 등장시킴으로써 화면의 긴장감을 높이는 방향에서 작업해 왔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맥거핀 효과 등 그의 작업이 담론적 측면에서 독보적인 깊이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보여주는 근거로 작동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는 이미지의 무게감을 덜어내고 웹상에서 '밈'(Meme)이나 '짤'과 같은 용어로 돌아다니는 가벼운 이미지들을 수집하여 그려내면서 이를 작업 전면에 배치하고 있는데 이는 권여현 작가 작업에서 또 다른 변화를 모색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게 만드는 부분이다.
두 번째 관찰되는 차별적 지점 역시 첫 번째 지점과 상당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작가가 선택하는 이미지의 성격뿐만 아니라 그 이미지를 자신의 회화 내에서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이미지를 선택할 때와 유사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무게감 있는 표현 보다는 좀 더 가볍고 즉흥적인 표현에 더욱 몰입하여 작업하고 있는 것을 근작 가운데 발견하게 된다. 특히 표현함에 있어 세밀한 묘사를 하거나 여러 겹 층층이 쌓아 올리는 과정을 거치는 방식 대신 좀 더 즉흥적이면서 빠르고 가볍게 그려내고자 한 것을 볼 수 있다. 과거 작업에서는 화면 내에서 이미지적 요소와 함께 그것을 그려내는 붓터치는 서로 이질감을 드러내며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그 힘있는 붓터치가 좀 더 이미지 안에 녹아들 수 있도록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이번 작업들에서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는 부분은 작가가 화면 내 이질적 요소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에 대해서이다. 작가는 화면을 가볍고 부드럽게 전개하여 이질감을 완화하면서도 이질감 자체를 제거하기보다는 은연중에 드러나도록 만들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인물들은 큰 나무 위에 올려져 있거나 나무 주위를 서성이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그 인물 주변에 자연스럽게 드러나 있어야 할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마치 인물 이미지를 나무형상에 어울리게 오려 붙여 놓은 것처럼 화면 내에는 여전히 이질적 요소들이 부각되어 있다. 이는 그대로 세 번째 차별적 지점과 그대로 연결되고 있는데 그것은 작업 내용상의 변화를 말한다. 이는 이전 작업과 단절로부터 시작된 변화가 아니라 작가의 사유 방식은 과거 작업과 그대로 연장되는 것이면서 동시에 변화의 요소들이 드러나 보이도록 한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특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즉흥적인 방식을 취하게 된 원인 역시 여기에 있는 것으로 읽혀진다.
권여현 작가는 지금까지 그의 작업 여정에서 다양한 형태로 작업에 변화를 시도해왔다. 그러나 그 변화 가운데에서도 자아의 실체를 찾으려는 노력은 계속되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간이 현실에서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를 찾으려는 노력이 해결책을 줄 수 없듯이 점차 회의의 지점에 이르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현대인들이 대안적으로 찾게 되었던 헤테로토피아적 탈출구 역시 일시적이고 일회적인 처방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 하였기에 그의 작업 역시 점차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과 같이 가볍고 즉흥적이면서도 무언가 시니컬한 태도와 분위기로 변화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신화와 철학과 역사를 섭렵하는 가운데 그가 발견하게 되었던 것은 그가 찾아 나섰던 것들에 대한 회의감뿐이었을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확인하게 된 것은 외부 세계를 감각하는 몸이라는 실체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인간에게 꿈과 희망과 유토피아의 세계까지 가져다 줄 것처럼 보였던 모든 인간의 지식과 인류의 문명 전체를 회의할 수 밖에 없게 한 현실은 헤테로토피아적 대체물로 귀착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며 그 결과 작가는 단지 몸이 감각한다는 것 자체에 주목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 작업에서 이 회의감은 신화, 철학, 역사 전체를 맥거핀, 다시 말해 속임수, 미끼처럼 작동되도록 하여 결국 몸의 행위 혹은 감각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는 지점에서 극적인 상황으로 표출하게 되었다면 이번 전시의 경우 작업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에서 자주 발견되는 풍선껌처럼 일상 속의 가볍고 일회적인 대체물들에 안주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심드렁하고 무관심한 표정의 모습들로 변신시키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인간상들은 자연 본연의 기존 체계에서 벗어나 중심을 잃고 넘어져 있는 나무들 위에 합성된 사진처럼 배치되어 있다는 점인데 이 낯설고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 숲의 풍경은 그곳에 보이는 인간들의 다양성이 가능하도록 만든 토대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 인물들의 모습은 그들에게는 평범한 삶의 일상일 수 있음에도 다른 어떤 이들에게는 일탈적 행위이거나 비난의 대상이 되는 행위를 하고 있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절대적 기준이라고 믿어왔던 것들이 무너져 내린 시대에서의 인간의 위치는 바로 이러한 모습일 것이다.
이처럼 이번에 새롭게 보여주는 작업들에서는 권여현 작가가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시각과 태도가 그대로 담겨 있다. 그의 작업들은 권태로울 정도로 낯선 것들이 일상화된 세계에서 또다시 일탈을 꿈꾸는 것 역시 지겨울 수 있지만 그 일회적인 헤테로토피아적 공간에서 일시적으로 숨을 쉴 수 밖에 없는 현대인들의 모습은 인간의 실존적 위치를 더 강하게 감각하고 인식하도록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권여현 작가에 의하면 그 감각과 인식의 현장이 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몸이다. 작가는 행위의 증거물처럼 캔버스를 마치 사건의 현장을 보여주듯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그가 수집한 인간들의 모습에서 일상일 수도 일탈일 수도 있는 낯선 행위들을 포착하고 그것을 자신의 몸을 움직여 그려낸 행위를 통해 캔버스 위에 물질로 남겨둠으로써 그것을 눈 앞에서 감각해 보도록 만들고 있다. 그런데 이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그가 캔버스에 그려낸 것들은 낯선 인간들의 행위일 수 있지만 우리가 감각하게 되는 것은 회의감 속에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붓질만을 하고 있는 시니컬한 작가의 세상을 향한 시각과 태도일 수 있다는 점이다. 권여현 작가는 작업을 하는 가운데 지속적으로 변화를 모색해 왔다. 그리고 그 변화로부터 시작된 낯선 것들로부터 그 차이가 갖는 의미를 들춰내 왔다. 작업에서 보이는 회의감의 깊이는 바로 이 같은 작가의 오랜 작업과 사유의 시간에 쏟은 열정에 비례하고 있는 것 같다. 관객들이 만약 이 지점으로부터 그의 작업을 읽어 간다면 아마도 이로부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 대해 한걸음 더 접근해보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