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하는 자아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용어 중에서 ‘이중인격’이란 말은 부정적 맥락에서의 가치판단을 전제로 하고 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 지킬과 하이드, 도플갱어 등은 모두 분리된 인격을 지칭할 때 동원되는 말이다. 그러나 단 하나의 완전한 존재, 통일된 자아란 것이 가능할까? 이미 프로이트(S. Freud)에 의해 불완전한 존재이자 모순에 찬 존재로서 인간의 심리가 밝혀진 마당에 존재의 존엄성에 근거하여 변화무쌍하고 예측하기 힘든 인간의 마음을 도덕적, 윤리, 종교적 척도에만 의존하여 판단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훈육적일 수 있다. 욕망하는 기계인 육체에 대한 영혼의 승리, 삶의 개선을 향해 질주하는 정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능력인 창조성 등은 모두 낭만주의가 물려준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낭만주의적 자아는 근대적 주체의 등장과 함께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근대적 주체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적 깊이가 아니라 이성(reason)과 합리주의였으며, 진보, 성장, 발달을 목표로 이성을 도구화했다. 이러한 이성중심주의가 규정한 자아란 곧 데카르트(R. Descartes)가 제시한 ‘생각하는 자아’(Cogito)로 소급된다.
그러나 우리는 타자와의 분명한 차이를 나타내는 주체의 독립성, 완전함 등이 형이상학적 허구임이 점점 명백해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즉, 현대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독립된 개체로서의 개성과 자기양식을 지닌 주체가 아닌 분열적이고 혼성적이며 파편화된 다중인격체가 되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 연관 없는 다양한 정보에 둘러싸여 있는 까닭에 주체의 동일성은 이제 더 이상 자아를 규정하는 유일한 척도가 될 수 없으며 자아의 진정성(authentic self) 대신에 전혀 없는 자아(no self at all)가 곧 자아인 시대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의 현실인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최근 작가들이 너나할것없이 거의 신경증적으로 자아정체성에 대해 집착하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자아부재를 드러내는 과정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멀리는 그리스의 회의론자로부터 쇼펜하우어를 거쳐 니체로 이어지는 니힐리즘의 계보를 따른 것이라고 보여질지 모른다. 실제로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니힐리즘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최고의 가치들이 탈가치화가 되는 것이다. 목적이 없는 것이다. ‘왜’에 대한 대답이 없는 것이다.”
물론 니체가 말하고 있는 최고의 가치란 서구사회를 지탱해왔던 최고선인 ‘신’이다. 신으로부터 자유, 그것은 라캉(J. Lacan)이 말한 ‘조각난 몸’으로부터 자기 몸을 전체적으로 인식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전체로서의 몸을 인식함으로써 고단한 삶, 근원적 결핍으로서 욕망에 시달려야 하는 인간이 탄생한다. 아버지의 이름(규범, 권위, 법)으로 그것을 억압하면 할수록 욕망의 히스테리 또한 상승한다. 욕망의 히스테리의 절정, 그곳에 지속적으로 분열하는 자아가 있다. 그러나 주체의 분열이란 실재가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다중적이었던 주체가 이성의 이름 아래 억압되고, 은폐되었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주체의 통일성이 아니라 다양성을, 안정된 주체가 아니라 유동성과 역동성에 의해 끊임없이 운동하는 것임을 나타낸다.
부유하는 자아로부터
권여현의 ‘부유하는 자아’란 이러한 유동성 속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 분열된 자아를 용인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기억하건대 그는 실존의 문제를 다룬 초기작업으로부터 지금까지 거의 편집적으로 자아의 문제에 대해 매달려왔으나 언제나 알 수 없고 규정 불가능한 자아를 드러내었다. 상황 속에 던져진 존재로부터 유년의 빛 바랜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사진에 이르기까지, 거리의 부랑아나 중국집 배달원과 같은 룸펜프롤레타리아로부터 잘 차려입은 현대의 귀족적인 여인으로 분장한 사진에 이르기까지, 마침내 날개가 있으나 승천하지 못하는 병약한 천사에 이르기까지 연출된 자아는 단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다중인격체로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려는 것이었다. 그것에는 늘 질문의 제기만 있었을 뿐 해답이 있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가 던지는 또 하나의 질문이 부유하는 자아인 것이다. 부유하는 자아란 정주(定住)가 오히려 불안을 야기하는 유목적 사유의 결과인가, 아니면 참 진리를 찾아 선지식을 찾아 나선 선재동자의 목표가 뚜렷한 여행과 같은 것인가? 나로서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자아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아에 대한 믿음 자체를 해체하는 것이다. ‘왜’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불가지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자아는 주체의 자기동일성을 확정한다는 섣부른 신념에 봉사하느니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오리무중인 우리 시대에 자아란 그것이 무엇인가를 지속적으로 되묻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직할지 모른다. 묻는다는 것은 앎에의 욕망을 전제로 한다. 비록 무엇에 대해 알았다고 깨닫고 환호하는 순간 그 앎이 미신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권여현의 작업은 이미지로 대신한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렇다고 그의 작업이 철학의 도해라는 것은 아니다. 부유하는 자아란 철학 너머에서 철학하기, 곧 메타의 메타인 것이다. 그것을 위해 그는 보편적 언어, 해독 가능한 이미지를 차용한다. 정보혁명의 산물인 신인류 ‘넷맨’(Net-Man) -즉, 머리에 또 하나의 눈인 전자우편의 기호 ‘@’를 달고 있는 사이보그를 연상시키는 인간, 신을 영접하는 무당의 트랜스(trans) 상태, 그 완전한 엑스타시에의 황홀한 몰입지경, 총천연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을 메두사나 히드라의 그것처럼 곧추세운 펑키족, 살생부를 쥐고 무자비한 눈초리로 노려보는 저승사자, 화투나 카드 등 온갖 잡기도구를 마치 갑주처럼 무장한 채 의기양양한 노름꾼(gambler) 등은 너무나 익숙한 이미지이므로 차라리 우화적이다. 때로는 현실 속에서, 때로는 미술사 속에서, 때로는 현실에 가위눌린 환상 속에서 빌려오고, 변형하거나 발전시킨 자아의 이미지는 차용된 것, 복제된 것, 또는 연출된 것으로 등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마에 부적처럼 각인된 정보사회의 징표를 마치 또 하나의 눈처럼 달고 있는 넷맨이야말로 우리시대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존재는 정보에 의해 구축된 것이며, 그의 또 하나의 눈은 세계를 밝히는 지혜의 눈이 아니라 가상세계를 향해 무한하게 열려있는 잉여의 출구이다. 이 잉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을 ‘벡터X’라고 불러보자. 유동하는 벡터X는 그를 상상의 자유 속으로 인도하는 요소이다. 그래서 그는 벡터X의 인도를 받아 무당, 노름꾼, 저승사자, 펑키 제너레이션 등으로 자의식을 무한히 확장, 증식시키는 모험을 감행한다.
단 하나의 정체성이 아닌 복수의 정체성을 찾아 나선 이 여행에서 그는 길라잡이면서 동시에 방관자의 위치를 지키기도 한다. 예컨대, 자신을 신윤복의 그림에 대한 혼성모조(pastiche) 속에 나타나는 한량으로 재현하거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 속의 특정인물로 연출함으로써 그는 그 현장의 증인이자 화자(話者)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연출은 다소 기념비적이기 때문에 부유하는 자아라기보다 견고하게 구축된 자아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즉 모티브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어떤 일관된 주제 아래 일련의 서술구조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의 의식의 지향성과 작업이 내포하는 내용에 있어서 충돌이 일어난다. 이 충돌이 그의 작품을 부유가 아닌 정착으로 유인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즉, 작품 속에서는 분열하고 분열된 것들이 충돌하도록 의도, 연출되고 있으나 정작 그의 의식세계는 여전히 안정된 자아로 회귀하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역설이 그의 작품을 지극히 견고한 재현의 세계에 머무르도록 채근한다. 마침내 그가 제기한 질문들은 자기와의 화해를 향해 치달릴 수밖에 없다.
거부할 수 없는 나르시시즘의 유혹
흥미롭게도 그는 자신의 작업실을 ‘각아각’(覺我閣)이라 부르고 있으며, 그의 애완견에게 ‘각’(覺), 자신이 심어놓은 소나무에 ‘각아송’(覺我松)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인간의 ‘자아’는 다른 동물과 달리 스스로를 반성하는 자의식을 포함하고 있다. 자의식은 자아를 생성하기 위하여 먼저 자아를 반성의 대상으로 삼아야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과도한 자기탐구는 반성적 인식에 근거를 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작업과정과 그 결과인 작품은 심리자아의 단초 설정을 위한 ‘존재적 자아’와 의식자아의 단초 설정을 위한 ‘심층적 자아’가 투영된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생물학적인 현존은 단지 여기 있음을 지시할 뿐 진정한 존재라고 할 수 없으며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심리현상 또한 물리적 현존과 연결되어 의식의 층위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자아란 감각될 수 있으면서 그것을 넘어선 제2의 요소인 심리와 의식세계를 포함함을 알 수 있다. 그가 제시한 ‘각아’란 바로 이러한 제2의 존재인(存在因) 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규정하고자 한 시도인 것이다. 이 내적 자아를 드러내기 위해 이미지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는 바 여기에서 그의 작품이 존재적 자아와 심층적 자아가 투영된 이미지란 점이 밝혀진다.
<터미네이터>란 영화를 보면 미래세계의 인간과 그를 쫓는 기계인간이 어느 날 알몸인 채로 현실공간 속에 느닷없이 등장하는데 내부순환도로의 어느 지점이나 터널 속에 거의 나체로 갑자기 등장하는 그의 자화상을 그린 그림은 이 영화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작품을 보아온 나에게 이러한 이미지는 익숙한 만큼 다소 식상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젠 아예 자신을 현대의 주술사 혹은 교주이거나 보스로 연출한 퍼포먼스까지 기획하고 있다. 시나리오에 의하면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의 존경과 충성을 마다하고 자신이 양육하는 개에게 경배함으로써 무리로부터 추방당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퍼포먼스가 끝난 뒤 한동안 전시공간을 지키던 개는 전망대 위에 모셔진 작가 자신의 신체를 직조한 초상조각과 함께 조각품으로 대체되어 전시된다. 전망대 위에 모셔진 직조된 조각품은 나르시시즘의 우상(偶像)인가, 아니면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분리된 분신(doppelgänger)인가? 그렇다면 경배의 대상이었던 개는 또 무엇인가? 고대 이집트나 인도, 심지어 부여나 신라인들조차 동물숭배의 증거를 남기고 있다. 단군신화에 따르면 홍익인간들은 모두 곰의 자손이다. 그는 자신의 애완견과 함께 작업실 마당에 심어놓았던 소나무도 전시장에 옮겨놓는다. 이 식생(植生)의 행위는 애완견과 함께 자연에로의 회귀란 메시지를 담고 있다. 말하자면 개와 소나무는 불완전하고 유동적인 주체와 이 자아의 터전인 자연간의 화해를 전제로 한 타협안(Modus Vivendi)의 상징인 것이다. 여기에서 그의 관심이 과도한 자기집중으로부터 생명예찬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한가지 사실이 분명해진다. 즉, 그가 이미지로 표상한 부유하는 자아란 분열, 파편화된 것이라기보다 자기증식의 과정을 보여주는 나르시시즘의 또 다른 형태란 것이다. 즉, 특유의 분장과 연출이 주체의 분열로 위장된 나르시시즘을 드러낸다는 점을 잊어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나아가 이미지에 대한 그의 차용은 ‘이미지에 대해 이미지로 응답하기’ 곧 이미지의 역사에 대한 유쾌한 전복이자 반란이며 궁극적으로는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는 것인데 그 낯설게 하기의 과정 속에 자신을 틈입시킴으로써 여전히 그가 이 서술구조 속의 주인공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나르시시즘의 축제이자 또한 자기애에 대한 내부로부터의 모반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하나의 내적 파열이 형성된다. 한편에서는 사고하는 주체로서의 코기토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으나, 다른 쪽에서 근원적 고뇌의 원인으로서 코기토가 고개를 들고 있다. 그것이 분열하는 자아로 비쳐질 수 있으나 그가 작성하고 있는 ‘주관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자기신뢰란 나르시시즘에의 헌신이 마치 꼬리뼈처럼 부착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각아’를 추동하는 에너지이자 그 원인이기도 하다. 물리적 존재를 넘어서는 것으로서 무아(anatman)의 열반을 지향하기보다 흥미진진한 삶의 드라마를 연출하는 이 역동적 에너지를 인정함으로써 그의 작품은 시각적 풍요로움을 지킬 수 있다. 이 에너지가 방출하는 자장(磁場) 속에서 그는 여전히 유동하고 있다. 부유란 정처 없는 유랑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유동을 의미한다. 그것은 살아있음의 목적이자 삶 그 자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