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현이 자아정체성을 찾아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스스로 묻고 대답해왔던 막막한 유랑 생활을 접어두고, 보다 본격적이고 급진적인 방식의 가로지르기를 시도하고 있다. 사회와 국가와 세계에 직면한 자아 정체성의 분열적 양상을 찾아 떠돌아 다녔던 지난 십수년 그의 작업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이번 전시는 몇 해 전부터 선보여 왔던 동서고금의 시각이미지 시간 여행을 전면적으로 시도한 경쾌한 도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도 대다수의 출품작들이 제자들과의 공동작업 프로젝트인 ‘사제동행세미나’의 기획에 입각해서 제작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나아가 시간의 축선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기 위해 원본의 가치를 변질시킨 통시성 연구 프로젝트라는 점도 눈여겨봐야할 대목이다. 더불어 작가의 주변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체험적 감상기에서 벗어나 점점 호명의 주체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이제는 자아정체성을 발견하는 방편이자 과정으로서의 작업을 넘어, 자아의 외연으로 시선을 넓혀나가고 있다는 점 또한 이번 작업의 밑그림을 새롭게 그리게 한 요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렇듯 ‘공동작업, 원본 차용, 시선 확장’ 등 세 가지 요소로 압축되는 권여현의 전환적 모색은 자의식의 변모에서 출발한다.
소여된 바 ‘나’라는 물리적 실체는 항상 거기에 그렇게 존재했지만, 실체적 자아는 주변과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십수년의 작업을 통해 확인해온 것이다. 계열체적 다양성보다는 통합체적인 맥락화를 시도하게 된 것은 이렇듯 오랜 세월 쌓아온 자아 탐문의 결과이다.
그는 기나긴 자아탐색의 길을 비껴가기 위해 미술사를 끌어들이고 있다. 동서고금의 미술사 와 시각문화를 가로지르며 박제화 된 이미지들을 끄집어내서 새로운 독해를 시도한 것이다. 원작에 등장하는 인물을 자신과 주변사람들로 대체해서 사진작업으로 뽑아내고 그 위에 옷을 입히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미술사와 대중문화를 통해 잘 알려진 이미지를 차용해 원본의 가치를 새롭게 해석해낸 이번 작업들의 대부분은 학생들과의 공동작업으로 이루어졌다. 이점은 기성의 작가 개념이나 예술생산의 진정성과 그 가치에 대한 심난한 도전의 의미를 담고 있다. 나아가 미술을 매개로 만난 주변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작가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만들어내려 했다는 점에서 스스로 선택한 독특한 방식의 줄타기이기도 한다. 그는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정체성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소여한 것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을 누차 강조해왔다. 권여현의 이러한 원본 패러디 작업은 바로 이러한 탈근대적인 주체의식과도 무관하지 않아보인다.
그는 ‘미술을 가르치는 일’ 자체를 창작행위로 전환해냈다. 회화를 가르치는 일은 옛그림들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에서 출발한다. 이 때 그가 제시하는 고전들은 미술사라는 틀에 갇힌 죽은 이미지들이다. 가로지르기의 핵심은 관념화된 시각이미지를 자신과 자신의 주변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이 과정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당대성을 상실한 텍스트들을 다시 읽어내게 만들었다. 작품들은 템페라, 유화, 수묵채색화, 사진 등 여러 가지 재료로 제작된 종교화, 초상화, 풍속화, 대중문화 이미지 등 시각문화예술 전방위에 걸쳐있다.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익숙한 이미지들을 하나씩 해부해나가는 과정에서 여러 보조작가들의 각자 다른 해석이 쏟아질 것이라는 기대는 단순한 배껴그리기를 넘어서려는 권여현의 기획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대전제였다.
권여현은 제자들과 함께 시간 여행에 나서면서 가능하면 완벽한 재현이 아닌 새로운 창의력을 끌어내려 했다고 한다. 묘사력에 비해 창의력, 인내력이 덜한 요즘 학생들에게 있어 이 과정은 소중한 수업이었을 것이다. 원본과 복제본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서 모델의 어설픈 동세와 사진 속의 몸매가 드러나도록 옅게 그리는 장치도 필요했다. 스스로 모델이 된 학생-보조작가들은 각자의 개성에 따라 원본을 패러디했다. 이 때 교수 권여현의 입장은 두말할 나위 없이 감독(Supervisor)이다. 여기서 감독의 역할은 기획자이자 작가의 지위를 가진다. 그가 제자들과 손을 잡고 커다란 서양 명화 속으로 들어가서 스스로 고전 속의 모델이 된 그림을 그려놓고는 그 그림으로부터 다시 걸어 나오는 스토리의 동영상은 이번 전시의 출발과 과정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인상파의 기법으로 고전주의 작품을 그려낸다거나, 현대적인 미감과 고전적인 미감의 차이를 발견하는 것 수묵채색화의 먹선을 뻣뻣한 털붓에 아크릴물감으로 재해석해내는 일 등은 그림을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들로서는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몸에 관한 관심이 높아진 젊은이들이 자신의 몸 이미지를 이용해 옛그림들을 읽어내는 과정을 객관화 시키는 일 또한 주요한 관심사였을 법하다. 한국의 현대인 인체가 동서양의 옛그림 속에 나오는 인물들의 모델이 되었을 때 발생하는 차이들에 직면해 나름대로 창의력과 응용력을 발휘해 나가는 과정은 상당한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야 그만큼의 희열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르네상스 3대 거장에서 피카소와 뒤샹에 이르기까지 절묘하게 원본의 이미지를 차용한 작품들은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와 ‘그림을 본다’는 행위의 이원화된 영역구분을 확연하게 좁혀준다는 점에서 관람들에게 매우 흥미롭게 다가갈 것이다. 단원과 혜원을 되살린 그림들은 설정 자체의 기발함에 매료될 뿐만 아니라 재해석된 붓질의 묘미를 살펴보는 보-너스를 제공해줄 것이다. 한국의 근현대사에 등장하는 역사적인 인물화 연작이나 배트맨, 울트라맨, 졸라맨 등을 패러디한 <나도맨> 같은 작품도 눈에 쏙 들어오는 출품작들이다.
그 가운데서도 2인의 라이프 캐스팅 인물상과 오브제를 조합해 설치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너의 머리 속에 존재한다>라는 작품은 앞서 말한 시간 여행의 당대적 맥락화를 설명하는 데 있어 가장 유용한 텍스트이다. 하나의 작품 또는 전시를 통해서 유사한 계열의 대체가능한 요소를 나열하기 보다는 시대를 관통하는 별개의 요소들을 차용하여 또 다른 통합체로 맥락화 하려는 의도가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공시성,계열체,분절/반가사유상(신라)/다비드상(미켈란젤로)/샘(뒤샹)/미술사(개별적파편)
통시성,통합체,절합/ 교수 권여현 / 학생 변시재 / 수세식 좌변기/거울과 문(통합적 성찰)
신라의 반가사유상과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뒤샹의 샘은 결코 통합체적 맥락에서 연결지을 수 없었던 미술사적 분절적의 요소들이다. 권여현의 이 작품은 이러한 분절적 요소들의 계열체적 나열 체계, 즉 각기 다른 패러다임에 입각한 개체로 존재하는 미술사의 이질적 요소들을 하나의 통합체로 관통하여 맥락화 하고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동서고금의 각 요소들은 도표와 같은 설정에 입각해서 맥락화 한다. 동서고금이 한자리에 모인 이러한 도표 하단의 요소들은 거울과 문이라는 장치를 통해 통합적 성찰로 이어지고 있다.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적 개념을 빌자면, 계열체(Paradigm)와 공시성(Synchrony) 보다는 통합체(Syntagm)와 통시성(,Diachrony)의 맥락에서 접근함으로써, 계열체적인 분절(Segmentation)을 넘어서는 통합체적인 절합(articulation)을 염두에 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요컨대 동서양의 고전과 현대를 별개의 분절적인 것으로 간주하기보다는 당대의 맥락으로 끌어들여 동시대의 것으로 연결(절합)한 통시적 맥락화 작업인 것이다.
한국과 서양, 동시대와 역사시대, 원본과 복제본, 개인의 일품창작과 다수의 공동창작 등 여러 가지 문제적 개념들이 복잡하게 혼재한 일련의 과정들은 시각예술(사)에 대한 권여현의 도전을 더욱 흥미진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짬뽕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권여현은 이제 탈모던한 미술개념에 실질적으로 한발 더 다가선 셈이다. 권여현의 작업들을 두고 적지않은 비평가들이 그의 포스트모던한 일면에 대해 언급해왔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늘 비평의 잣대를 무디게 만들어왔다. 내가 보기에 그는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서의 근대적인 가치를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지켜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작업들 속에 탈근대적인 시각요소들이 곳곳에 드러나 있음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기는 여렵다. 네러티브, 노스텔지어, 혼성모방 등 넓게는 ‘탈모던’하며, 좁게는 ‘탈미니멀’한 요소가 확연하기 때문이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탐문 또한 여느 모더니스트들이 절제의 미학을 추구한 것과 뚜렷이 비교되는 요소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근대적 미술 생산과 향유 시스템에 충실한 화가였다.
요컨대 작가 일인의 붓놀림으로 만들어낸 일품(逸品)으로서의 회화의 가치를 뒤짚어버린 일은 이번 전시의 가장 큰 얘깃거리이다. 포스트모던을 분절적이고 의외성에 가득한 재기발랄한 새로운 미술사조 쯤으로 인식했던 지난 시대의 오독을 지속하기에는 권여현의 이번 연작들이 완연하고도 전면적인 변화양상을 띄기 시작했다. 탈근대의 기획은 분절(계열)보다는 절합(통합)에 가깝다는 점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제 그는 기나긴 자아탐문의 길을 거쳐 미술사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현실 속의 화가이다. 그것이 자아의 터널이든, 미술사의 시간여행이든 앞으로도 오랫동안 지속될 화가로서의 여정은 늘 새로운 도전을 목전에 둔 숙명적인 움직임의 연속이라는 점을 다시 생각해본다. 권여현의 여정은 미술 내부의 맥락에 갇히지 않고 삶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현실과 이상, 역사와 당대를 오가면서 보다 폭넓은 가로지르기로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