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 미술의 역사에서 권여현은 매우 명시적인 지표다. 1961년생인 이 작가의 이른 등장과 성공은 여러 면에서 징후적인데, 이를 설명하려면 우선 1980년대 한국 미술계의 상황을 이야기해야 한다. 1970년대 한국의 주류 미술계는 ‘한국식’ 미니멀 화가들과 그들의 연대에 의해 지배받고 있었기 때문에, 젊은 작가들은 그러한 상황에 몹시 숨막혀했다. 그러한 상황에 타격을 입히며 새로운 물꼬를 튼 것이 바로 ‘현실과 발언’그룹(1979년)이었다. 현실과 발언 이후의 민중미술가들 대개는 미술계의 일신을 위해 미술과 사회 간의 단순간 관계를 복원하고, 예술의 계급적 성격을 강화해 내고자 노력했다. 이렇게 미술계 밖에서 에너지를 찾아낸 민중미술가들과는 달리, 미술계 내에서의 논리와 에너지 창출에 집중하는 이들도 나타났는데, 그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을 내세운 새로운 구상회화 작가들이었다.
민중 미술과는 달리, 포스트모더니즘을 내세운 새로운 구상회화의 흐름은 ‘한국식 모더니스트 페인팅’이 주류의 자리를 점하고 있던 1970년대의 종점에서 인위적으로 진작되고, 또 권유된 경향이 없지 않다. 윤우학과 서성록 등의 비평가에 의해 일종의 그룹 운동으로 제안된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을 오독한 것으로, ‘모더니즘’을 박서보 사단의 회화로 한정짓고, 그에 맞서는 이념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내세워 새로운 구상회화를 추구한 것이다. 자칭 포스트모더니스트 김복영이 발표한 1980년대의 선언문 ‘80년대 청년문화 세대여! 후기 모더니즘의 장막을 열어 젖히기 위한 예술문화 기수론 서문 3장’은 역사적 희극에 불과한 것으로, 개인성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던 사상의 특성에 반대되는 ‘선언문’의 형식을 통해 모더니즘을 비판하고 나섰다는 사실은 (그리고 그것이 미술계 내에서 적잖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은) 지금 다시 보아도 굉장히 민망한 일이다. 물론, 민중미술의 주요 작가들이 서울대 출신인데 반해, 포스트모더니즘을 내세운 진영의 주요 작가들이 홍대 출신이었다는 사실도 기묘한 일이었다.
아무튼 이러한 젊은 세대들의 새로운 도전에 의해 1980년대의 회화에는 새로운 이미지들이 등장했는데, 이는 크게 보면 독일의 신표현주의와 미국의 뉴이미지, 이탈리아의 트랜스 아방가르드 등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했다. 캔버스에 새로운 이미지를 불러 세우는 흐름은 1960년대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 전후 세대에 속하는 작가들-게오르그 바젤리츠(1938년생)에서 안젤름 키퍼(1945년생) 등-에 의해 지속되었지만 본격적인 작업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1980년대의 일로, 아직도 많은 작가들은 <프랑스신구상미술전>(서울미술관)과 <구상적 충동전>(워커힐 미술관, 곤도 유키오와 난조 후미오 기획)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1980년대에는 새로운 이미지를 내세운 그림들이 다수 등장했는데(임봉규, 이홍덕 등이 신표현주의적 경향을 보여준 국내 작가들 가운데 연대가 가장 앞서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신표현주의의 어법은 다양한 작가들에게 널리 차용되었을 뿐, 창작 현실에서 하나의 주된 흐름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신구상’이라는 명칭은 박서보 사단에 맞서는, 일종의 방어적 호명의 효과 때문에 애용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1980년대의 미술계는 미니멀한 단색조 회화의 지배와 일부 서울대 출신들을 중심으로 한 민중미술의 도전, 그리고 홍대 출신의 비평가들과 젊은 작가들에 의해 주도된 포스트모더니즘 그룹의 대립 구도로 거칠게 정리해볼 수 있다. 오늘날 1990년대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주요 작가들 최정화(1961년생), 이불(1964년생), 김수자(1957년생), 박이소(1957년생), 정서영(1964년생), 서도호(1962년생) 등과 큐레이터, 평론가들 김홍희(1948년생), 이영철(1957년생), 김선정(1965년생), 이영준(1961년생), 박찬경(1964년생) 등은 이러한 삼각의 대립구도를 깨뜨리며 등장한 인물들이라는 공통된 특징을 지닌다. (떠오르는 이름들을 무작위로 나열한 것이니 구체적인 거명에 대해 오해없기 바란다.) 내가 이 가운데 권여현을 제일 먼저 지목해 다루고자 하는 데에는 그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두각을 나타내며, 일찍이 전업작가로 자리를 잡았다는 점, 1980년대에 내세운 회화 창작의 기본 논리를 고수하며 여전히 흥미로운 작업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오늘날 최정화나 서도호, 전수천 등 많은 작가들이 자신들의 작업 초기에 보여주었단 페인팅 작업과는 영 무관해 보이는 작업을 펼치고 있는 것과 대조된다), 그리고 이제는 그가 너무 일찍 구세대 작가군으로 분류되어 버리고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나르시시시스트의 미술사적 자기 정체화 게임
권여현은 창작과정이나, 전시경력, 수상경력 등을 보건데, 가히 탐욕적인 작가다. 그는 캔버스 여러 개를 늘어놓고 한꺼번에 여러 작품을 제작하며(그의 작업량은 엄청나다), 1988년 이후 지금까지 23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서울대학교 서양화 과학부 재학 시절이었던 1984년에 창작미협 공모전 대상을 수상했고, 대학원 재학 시절이었던 1986년엔 동아미술제 동아미술상을 수상했으며, 1990년에는 중앙미술대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데 이어, 1991년엔 이경성 선생이 제정한 석남미술상을 수상함으로써 소위 ‘성공한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공모전에 지속적으로 출품해 경력을 쌓는 일이 서울대학교 출신 작가들에게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자면, 그의 탐욕은 더욱 두드러진다. 하지만 그의 탐욕은 작업 초기에 드러나는, 다양한 스타일을 사유화하는 데에서 가장 크게 돋보이는데, 그는 그 탐욕적 전유를 다음의 6가지 원칙을 통해 진행했다.
첫째, 견고한 배경과 얇게 그려진 인간, 둘째, 부분적 추상과 전체적 구상, 셋째, 단계적인 제작과정, 넷째, 각 부분의 다른 양식들, 다섯째, 드로잉의 원리(과감한 구도, 날카로운 직선, 강렬한 광선, 전혀 다른 공간의 조합) 여섯째, 전면 이질 추상적 형식은 색채와 내용에 의해 통합된다.
1987년, <던져짐> 시리즈를 제작하면서 그가 작업노트에 정리해 놓은 이 원칙들을 보면, 그는 대단히 주도면밀하게 자신만의 논리를 세워 나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여타 다른 글들을 보면, 그의 작업과 작업 논리가 1980년대 말의 상황에서 그리 좋은 호응을 얻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비평과들과의 대화에서, 학창시절 은사로부터 ‘그림을 갑갑하게 그린다’거나 ‘감각이 없다’는 타박을 들었음을 반복적으로 밝히고 있는데, 직접 캐어물으니 ‘참 갑갑하게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왜 만들어 그리느냐’는 말은 윤명로 교수로부터 들은 것이고, ‘감각이 없다. 판화는 포기하는 게 좋겠다’는 말은 한운성 교수로부터 들은 것이라 밝혔다. 1990년대, 두고두고 그 일화를 언급했던 것을 보면 권여현은 자신의 그림이 ‘지나치게 장식적’이라거나, ‘말이 많다’는 세간의 평에 대한 억울한 심정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가 1988년 <공간>지 8월호에 쓴 글 ‘오형에게To Mr. Oh'를 보면 애당초 그가 결코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형! 이제 나도 말 좀 합시다... 내 작품의 근간이 답답한 실내에 던져진 인간을 표현하는 것이고, 그것의 표현을 위해서 배경을 먼저 두껍게 그리는 행위를 하는 것인데 형은 그 노력을 왜 그렇게 과소평가 하시오?... 자꾸 내가 무식하게 물감을 덕지덕지 쳐발랐다고 하는데, 또 감각적이고 장식적이어서 정신성이 매말랐다고 하는데, 그리고 민족의 혼이나 한국정신이 결여됐다고 말을 하지만요, 난 열심히 생각하고 노력했단 말이오... 나는 나름대로의 자부심이 있어요. 나 이전의 그림 중에서 내 그림과 유사한 그림은 일단 없다는 것이지요...”
‘오형에게’는 오병욱에게 부치는 글이었다는데, 글을 통해 볼 때, 그의 작업에서 배경에 차용된 여러 상이한 스타일들의 전유 방식에 주목한 사람은 별로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2000년 이전에 그려진 권여현의 회화들은 거의 모두 미술사적 위치에 대한 자의식을 드러낸 메타 발언들이라고 볼 수 있음에도,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반의 상황에서 미술계 내의 논리로 싸움을 벌여 나가는 작가의 방식에 공감하는 이는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미술 내적 논리의 싸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저는 미술의 내부에 대한 발언에서 시작해 점차 사회적인 발언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20~30대에 미술의 역사 안에서 나의 작업을 진행해 놓으면 그를 바탕으로 40대에는 대 사회적인 이야기들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 것이죠. 사회적 소재는 어쩌면 스테로이드 같은 겁니다. 스테로이드 주사 한 방이면 근육도 빨리 자라고 경기력도 크게 향상되지만, 선수 생활은 금방 끝나게 되듯이, 사회적 소재의 자극에 섣불리 맛을 들이면 작가는 빨리 주목받은 만큼 일찍 망가지는 것 같아요.”
권여현의 주도면밀한 미술사적 발언은 1985년작 <삼손-2>에서부터 분명히 드러나 있다. ‘색면추상’의 거대한 캔버스를 헤집고 나서는 인물은 필경 작가 자신일 터인데, 작가는 그 인물에 삼손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반면 1988년작 <던져짐>에서 인물은 그림 속 실내에 던져져 있고, 다시 그 장면은 벽면에 붙은 그림 속에서 반복되고 있다. 화면 왼편에 자리한 당구대는 삼각 논법에 대한 알레고리인가? 작가는 당구가 자기가 친 공에 의해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게임이라 재미있다고 했다.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이 지닌 유일한 카드는 자술할 수 있는 자율성에 있다고도 말했다. 그렇다면 화면 속의 붉은 격자 무늬는 신의 질서이고, 뒤로 고꾸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청년은 자살을 시도하려는 것일까? (해석은 다양하게 시도될 수 있다.) 이후 권여현의 그림은 보다 복잡한 알레고리 장치들에 의해 지배받게 되는데, 그 가운데 주요 알레고리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기둥 - 새로운 진리, 가치관의 정립 2, 자 - 척도의 필요성 3, 원 - 시간, 공간, 자아 4, 8자 - 뫼비우스의 띠 5, 씨 - 생명의 근원 6, ‘벼’ - 가족구성원에 대한 농경적 해석 7, 이빨 -자기 정체성에의 확인 8, ‘다섯손가락‘ - 난을 칠 때의 5가닥의 역할과 가족의 구성 9, 얼굴 - 빠른 시간 내에 정확한 판단을 해내는, 감각기관이 집중된 기적적인 컴퓨터 10, 깔때기 - 사회, 종교, 역사, 과학, 욕망, 사랑의 여섯 가지 매듭의 추적 장치 11, 바늘구멍 - 세계를 투영하는 인지체계, 시간성이 지닌 정서를 포착하는 바늘구멍카메라. 신체의 모든 기관은 바늘 구멍 혹은 렌즈다. 12, 매미 유충 - 부활과 변신의 삶 13, 각 - 집 나간 수캐, 작가의 분신, 기타 등등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알레고리는 1990년부터 화면 안에 등장하기 시작한 작가 자신의 모습이다. 초기에 작가의 초상은 왜소한 자아 탐구의 양상과 나르시시즘이라는 자기애 추구의 양상으로 동시에 전개되었는데, 그것은 곧 1991년부터 등장한 깔때기 모양의 여과 장치와 맞물려 인간, 인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이어졌다. 이 깔때기 모양의 다이어그램은 화면 안에서 다양하게 변형되어 순환적인 인생의 인과관계를 성명하기도 하고, 때로는 인체의 일부가 되는가 싶더니, 1996년부터는 바늘 구멍을 통해 투영된 영상의 구조와 겹쳐져 다층적인 의미의 알레고리 장치로 진화해 갔는데, 나는 어쩌면 그 처음은 곽훈의 그림에 등장하는 원뿔 형태를 권여현이 차용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알레고리 장치의 심화가 진행되는 가운데에서도 권여현은 초기에 자신이 세운 ‘부분적 추상과 전체적 구상’이라는 원칙을 고수했고, 화면의 배경 각 부분에 차용되는 스타일의 종류도 다양해져 갔다. 권여현의 캔버스에서는 안젤름 키퍼, 프란시스 베이컨, 데이비드 살르는 물론, 안토니 타피에스와 곽훈이 발견되고, 또 수 코와, 마샬 아리스만, 이담 등의 일러스트레이션적 기법 또한 발견되는데, 그 모든 것은 작가의 나르시시스트적 면모와 변신의 권능-자신에 대한 자폐적 고찰, 자신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벌레의 비유, 매미의 우화에 대한 집착과 다른 작가의 스타일과 전략의 교묘하고 능숙한 차용 등-을 통해 다시 하나의 논리로 수렴됨으로써 화면의 붕괴와 파편화라는 위험을 용케 벗어난다.
화가의 신화화/물신화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그의 분장 사진작업들-1994년 이후 2002년까지 진행된-은 다원적 자아의 전형화를 통한 사회적 유기 구조의 우화화를 꾀한 것이라는데, 결과는 그리 신통해 보이지 않았다. 그의 구축적인 회화의 특성이 사라진 사진 작업에서 정교한 기호놀이는 사라졌고, 명확한 사진 이미지 속에서 되려 의미들은 모호해지고 말았다. 게다가 사진이라는 매체의 특성 덕분에 그의 특기인 미술사적 게임의 진행이 불가능해지고 말았으니 사진이라는 매체의 선택은 일단 패착이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따라서 분장 사진작업보다는 사진 위에 페인팅을 진행하는 근작들이 더 흥미로우며, 이 새로운 시리즈에서 미술사적으로 유명한 도상들을 차용하는 것은 오류를 바로 잡는 적절한 전략 수정으로 보인다.
작가는 사진 위에 페인팅을 진행하는 새로운 시도를 통해 시각성의 새로운 차원을 작업 내부로 끌어들이고, 또 제자들과의 공동 작업을 통해 자기 자신을 재차 희화화하는데, 이 새로운 전략의 진행 과정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작가 자신의 신화화/물신화이다. 그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되기도 하고, 혜원의 풍속화를 차용한 그림에서는 기생이 되더니, <부유자아>에서는 떠 있는 듯한 내부순환도로의 기둥(I)과 동의어가 되어 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물신화의 과정에서 정점은 2002년의 개인전 <부유자아>에서 선보인 공연 <표상의 시대>였는데, 이 공연에서 그는 자신의 분신인 애견 ‘각’을 경배함으로써 자신을 따르던 무리에게 버림받는 작가 자신을 연기했다. 이 퍼포먼스에서 애견 각과 작가 자신은 다시 조각으로 대치되어 제시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자아각성Life Casting>이다. 이에 미술평론가 최태만은 ‘나르시시즘의 우상인가? 아니면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분리된 도플갱어인가?’라고 물었는데, 질문은 적절했다.
이제 권여현은, 다원적 자아, 파편화된 자아를 하나로 꿰어 맞추기 위해 있던 감수성 예민한 청년에서 벗어나, 자기 증식적인 나르시시즘의 단계, 보다 뻔뻔해진 장년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새로운 작업들에서 엿보이는 ‘타자성의 사적 전유’는 전략(타자들의 독특한 개성과 사회적 특성을 작가 개인의 소유물로 바꿔치는 전략)은 다소 비도덕적이고, 또 그만큼 위험해 보인다. 특히 요셉 보이스처럼 선지자적인 자세를 취해 학생들의 작업마저 선생의 그림자 아래로 끌어들이는 것은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필자에게 그것은 지나친 탐욕으로만 보인다.
반면, 그의 새로운 페인팅 시리즈 <부유자아 Floating the 'I'>>에서, 작업실 내부를 어슬렁거리는 그의 모습은 예사롭지 않다. 이는 상품처럼 물신화된 작가의 사회적 자아가 다시금 화가를 응시하는 무시무시한 광경인데, 그 무시무시함은 다시 퍼포먼스 <표상의 시대>와 연관된다. 이제 그림 속에서 물신화된 작가의 이미지는 작가 자신에 의해 연기되며 화면 밖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고, 그것은 다시 채색된 조각으로 응결되는 단계로까지 나아간 것이다. 이제 권여현은 복제가능한 다중적 의미의 물신이다. 하지만 이것이 성공인가? 내가 보기에 아직 성공을 단정하기엔 이르다. 물신화된 작가의 이미지가 퍼포먼스를 통해서 강화될 것인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퍼포먼스 때문에 애써 걸어놓은 작가의 물신화라는 마법은 무너져 내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퍼포먼스 <표상의 시대>는 ‘바로 그림에서 걸어나온 듯한 효과’ 덕분에 성립 가능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 효과는 과연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퍼포먼스 작업이 반복된다면 분명, 그 힘과 효과는 반감될 것이다. 즉 작가는 자신의 과거 작업에 기생하고 있는 셈이다. 메타의 관계와 기생의 관계는 맥락에 따라 같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잇다. 그러고 보면 현대 예술이라는 게임은 참 묘하기 짝이 없다. 어떤 작가는 승리를 거두려는 순간 무너져 내리기도 하고, 또 어떤 작가는 뒤졌다고 생각되었던 위치에서 시대적 성과를 거둬들이기도 한다. 조만간 권여현은 사비나 미술관에서 제 24회 개인전을 열 예정이다. 우리는 그의 게임이 얼마나 더 진행될지 그저 지켜볼 일이다. 허나 분명한 것은 4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성공을 구가하는 동시에 과거의 작가로 봉인되기에 적당한 나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