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해내기- 직설적 감성(感性)      박우찬(미술평론)

 


우리는 늘 변화를 원한다. 우리가 변화를 원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 “새로운 활력”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새로운 활력을 얻기 위해 기꺼이 변화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변화의 주체자였을 경우의 일이고, 변화의 대상자가 되었을 경우 사정은 정반대가 된다.

 권여현은 늘 변화의 주체자였다. 그림 형식상의 변화이든, 내용상의 변화이든 그는 언제나 변화를 주도해왔다. 그러던 그에게 지난 여름 원치않은 변화가 찾아왔다. 그를 변화시킨 것은 실연, 돈, 가족,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파생된 소외, 불신, 회의, 고통, 도피, 불안 같은 것들이다. 뭐. 그런 것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칠 것 없이 자기 앞에 놓인 성공이라는 열매만 바라보고 살아온 그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변화는 숨쉴 틈도 없이 그를 몰아 부치더니 이내 그의 삶을 보기 싫게 이그러뜨렸다.

 언뜻 보기에 그의 그림은 거친 터치로 감성을 쏟아 붓은 듯한, 그래서 매우 감정적으로 보이지만, 권여현의 작품은 매우 계산적인 그림이다. 그는 머리 속에서 완전히 작품을 구상하고 나서야 작업에 임하는 그러한 작가이다. 그래서 그가 감정을 표출하는 부분이란 그가 작품의 구상단계에서 허용한 화면의 어느 부분에서만 이루질 뿐이다. 그런 그였기에 그를 둘러싸고 무질서하게 진행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가 그렇게 믿어왔던 이성은 그에게 닥쳐온 새로운 변화에 대처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되질 못했다. 종잡을 수 없는 변화의 거센 소용돌이에 휘둘려 그의 삶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리자 그가 지금껏 견지한 삶의 방식, 그림에 대한 그의 확신도 크게 흔들렸다. 그는 그럴수록 열심히 그림을 그려나갔다. 열심히 그리면 이 혼란스런 상태를 벗어나 곧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틈만나면 그리고 또 그렸다. 그러나 그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그는 더욱더 자기만의 세계, 자기만의 좁은 공간으로 움추러 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전의 표현방식으로는 자신이 처해 있는 변화된 환경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본인으로서는 괴로운 나날의 연속이었겠지만, 이 변화는 그가 그동안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자기 내면의 세계를 탐색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이번 전시회에 보여주는 작품들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매던 지난 1년간의 고통 속에서 만들어진 산물들이다.

 권여현 같이 잘나갔던 사람이 자기 내부의 세계에 귀를 귀울이기는 쉽지가 않았을 것이다. 어느 작가나 그렇겠지만, 특히 권여현은 욕심이 많다. 일에 대해서도, 명예에 대해서도 그렇다. 사십도 안된 나이에 벌써 20여회나 되는 개인전을 가졌고, 각종 공모전에서도 남이 따라오기 어려울 정도로 업적도 이루었다. 현실세계에서 당당히 자기의 위치를 확보한 작가였기에 더욱이 그는 현실과는 다른 세계에 한눈(?)을 팔 여력이 없었다. 대학 졸업후 그는 줄곧 또래집단의 선두주자로서, 항상 매스컴의 관심을 받으며 자신의 길을 단단하게 다져왔다. 그래서 “고독”이니 “두려움”이니, “현실도피”니 하는 말들은 생소하기 조차 했을 것이다.

 그의 요청으로 작업실을 찾았을 때, 필자는 그의 화실에서 어떤 변화의 조짐도 느끼지 못했다. 그가 작업을 위해 펼쳐놓은 작품들을 보았을 때 소재는 조금 변화하였지만, 예전의 작품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가 지난 한해 동안 제작했던 수많은 드로잉작품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말이다. 오히려 원고를 부탁하는 그의 전화를 받았을 때, “전시한 적이 얼마나 되었다고... 그만큼 경력을 쌓고도, 또 경력이 필요해서 전시를 하나?”하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가 보여준 드로잉 (그는 지난 한해 수백여점의 드로잉을 그렸다) 작품들은 이전 그림들과는 아주 다른 것들이었다. 구토니 속물근성, 상처, 현기증... 제목부터가 아주 색달랐고 표현은 아주 직접적이고 단순하였다. 표현하고자 하는 목표가 명확해지니 표현하는 방식도 분명해진 것이다. 이전의 그림들과는 달리 그가 보여준 드로잉들은 작가의 설명을 듣거나 화면에 드러난 형상들을 읽으려고 고민할 필요가 거의 없었다. 그림들은 너무나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동안 그가 알아왔던, 그가 믿어 왔던, 그가 구축해왔던 세계는 ‘신기루’였나? 그는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다. 그가 자신의 삶에 대해 회의를 하면 할수록 그는 가슴 속에서 참을수 없을 만큼 매스꺼움이 느껴졌다. 토하지 않고는 견딜수가 없었다. 그래도 참아보기로 했다. 조금 참으면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겠지 하면서... 그러나 그러한 그의 희망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상태는 더욱더 악화되었고, 그의 삶은 뒤죽박죽이 되어 그를 답답하게 만드는 무엇인가를 토해내야만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리 매스껍게 하는 것일까?” 혹 이 것들이 나를 영원히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몸이 오싹해졌다. 한편 화가 나기도 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이 고통을 준단 말인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면 나를 괴롭히는 이 것들과 한번 대결해보자고 마음을 굳히자, 그는 자신을 혼란으로 내몬 것들의 실체가 보고 싶어졌다. 그는 그것들을 토해내고자 했다. 토해낸 것들을 관찰한다면, 그것들의 실체가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랜 동안 자신의 가슴 속에서 소화되지 않고 응어리져 있는 것들을 토해내어 화면에 다 두서 없이 쏟아부었다. 그가 끄집어 낸 것은 아주 오래동안 그의 가슴 속에 잠재되어 있던, 외형적인 성공에 묻혀 가슴 한구석에 처박혀 있던 인간 본성에 대한 회의, 신체적 콤플렉스, 왜곡된 성의 욕망, 현실로부터의 도피, 가족과의 갈등, 그가 한동안 잊고 지내던 교회의에서 가르쳐준 인간의 구원 같은 것들이었다. 처음 그것들을 정확한 형태로 끄집어내는 데에는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다. 그것들은 외부에 존재하는 이미지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가슴 속에 뭉쳐있던 그것들을 토해내어 끈기 있게, 때로는 과격하게 화면에 옮겨놓았다.

 토해내기는 그의 표현방법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사실 권여현의 그림은 해독의 난해함으로 보는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든다. 심하게 표현하면 그의 그림들은 보는 사람들을 괴롭히기까지 한다. 하나의 화면에 많은 이야기를 표현하려는 그의 욕심 때문이다. 그러나 표현하려는 내용이 명확해지니 그의 표현 역시 명확하고 단순해졌다. 표현이 단순해진 직접적인 이유의 하나는 그가 이전과는 달리 이지적인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그의 내면세계에 접근했기 때문이다. 마음은 이성처럼 예리하게 현상을 분석하지 못한다. 마음은 직접적이다. 마음은 단순하다.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고, 기쁘면 기쁘고, 매스꺼우면 매스껍고, 화가나면 화가난다라고 솔직하게 말한다. 그는 잠재의식 속에 존재하는 이러한 모습들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끄집어 내기를 원했다. 토해내기의 원래 목적도 바로 그 실체를 정확히 보고자 했던 것이었으니까...  드로잉을 선택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에게 드로잉은 직접적이고, 순간적으로 사물의 정수(精髓)를 뽑아내는 수단이다.

 그에게 자신의 내부에 감추어진 매스꺼운 것들을 토해낼 용기를 북돋아 준 에너지의 원천은 분노였다. 자신이 원하지 않은 변화를 가져온 사람과 주변에 대한 분노가 그의 작품에 새로운 힘을 준 것이다. 매주 사랑을 최고 선으로 가르치는 교회에 나가 사랑을 실천하라는 설교를 듣지만 그는 온갖 욕망과 온갖 모순으로 뒤범벅이 된 인간인지라 그의 안에서는 아직 분노의 불길이 꺼지지 않았다. 분노는 지난 일년 동안 그가 매스꺼움 것을 토해낼 수 있도록 그를 이끌어 온 힘이었다. 사람들은 분노를 통제해가면서 살아간다. 분노는 안정된 사회생활을 보장받는데 있어 가장 위험한 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되도록 분노를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그러는 동안 억압된 분노는 자신의 가슴에 차곡차곡 쌓이게 된다. 권여현 역시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나 원치는 않았지만 그에게 들이닥친 변화로 인해 분노가 터지자 그동안 그가 잊고 지내왔던 내면이라는 또 다른 세계를 볼 수 있었다.

 권여현은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는 격정적인 작가는 아니다. 그렇기에는 그는 너무 이지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회에서 그는 이전의 모습에서 벗어나 자신의 감성을 표출하는 데에 충실하고자 한다. 그는 이번 경험에서 소중한 것을 얻었다. 바로 직설적으로 말하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표현의 직접성, 순수성을 위해 그는 유화에도 드로잉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개입시켰고, 특히 신체에 물감을 묻혀 화면에 직접 찍기까지하는 등 그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방법도 시도하였다. 직설적으로 표현을 하다보면 오해도 생길수 있다. 그러나 직설적인 표현은 힘이 있다. 그리고 쓸데 없는 설명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

 비록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내면이라는 또 다른 세계를 기웃거리게 되었지만, 이번 기회는 그의 작품세계를 확장시키는데 커다란 전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