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 떠나는 길 : 청춘-아름다운 시절의 이야기

박우찬



오늘날 우리의 삶은 모래알같이 파편화되어있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급속히 변화한 사회는 우리의 삶을 파편화시켰다. 진지한 사고도, 밤을 지새우며 나누는 대화도 이젠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아니 그러한 것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의 대화는 자기와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가족하고의 문제일 뿐이다. 이러한 삶 속에서 우리가 자신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자기의 이야기다.

오늘날 우리에겐 공동의 신화란 없다. 공동의 신화는 이미 죽은지 오래이다. 실용적이고 효과적인 만남 속에서 가벼운 이야기만 존재할 뿐이다. 우리에겐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필요성도, 시간도 없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용건만이 있을 뿐이다. 최소한의 시간에 최대의 효과를 바라면서 말이다.

신화는 죽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매일매일 신화가 만들어진다. 자신의 신화 말이다. 우리는 죽은 신화에 주목하지 않는다. 생동감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 있는 신화에 주목한다. 싱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진한 땀냄새와 삶의 체취를 맡는다.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이야기 대신 자신의 신화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권여현은 자신의 이야기, 자신이 만들어온 신화의 보따리를 우리에게 펼쳐보이려 하는 것이다. 그의 신화는 자신이 자라온 삶의 궤적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 궤적을 같이 걸었던 가족의 이야기로 시작이 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시작의 출발점, 그것은 최소단위이기도 하고 가장 복잡한 단위이기도 한, 가족이라는 것이어야 할 것 같다.부(父)와 모(母)가 만나서 가족의 단위를 형성하는 일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나 우주의 생성원리와 그 모양이 매우 닮아 있다. 가족간의 정, 갈등, 화해 성장, 생장의 과정은 마치 나의 내부에 숨어 있는 알 수 없는 자아의 모습이 움직이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가족의 움직임은 나와 너무나 가까이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미쳐 인식하지 못했던 살아 있는 자아의 외화된 실체인 것 같다.

나와 가족은 별개의 개체이면서 역으로 소급하면 하나의 합체일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찾는 일, 가치관을 세우는 일, 윤리관, 우주관을 세우는 일은 가족의 형태에서 찾아야 할 될 것 같다.가족이 만들어진 길, 가족이 걸어온 길, 가족이 분화된 길을 거슬러 가는 일은 내 속에 존재하는 "나"를 찾는 길과 겹쳐져 있다"

 

권여현은 지금 진정한 자신을 찾아 나섰다. 권여현이 자신의 신화에 주목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앞에 잠깐 언급되어 있듯이 그도 이제 인생에서 본질적인 문제를 찾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한 점에서 시작된 시간은 지금 이 순간을 지나 미래의 어느 한 점으로 향한다. 우리의 삶은 과거와 현재로 이어진 이 시간의 연장선상에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가 없다. 단지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는 않는 변치 않는 본질이 있다. 우리는 한 눈에 본질을 파악할 정도로 전지전능하지는 않다. 다만 우리는 살아왔던 지난날 삶의 관찰을 통해 본질에 접근할 수 있을 뿐이다.

요즘 그가 주목한 주제는 "씨앗"이다. 세상이 어떤 식으로 변한다 해도 땅에 던져진 하나의 씨앗은 싹을 피우고 다시 땅에 떨어져 썪어 같은 종의 씨앗을 키워낸다. 신약성서를 펼치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낳고 ..."하는 외우기 어려운 구절이 나온다. 사실 아무리 잘난척하며 세상을 살았다해도 우리의 삶이란 "낳고"와 "낳고"의 사이에 단 한 줄로 요약되어질 것이다. ....권여현의 할아버지는 권여현의 아버지를 낳고, 권여현의 아버지는 권여현을 낳고, 권여현은 권여현의 아들을 낳고, 권여현의 아들은 권여현의 손자를 낳고... 할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임무란 새끼를 낳아 퍼뜨리는 것인가? 그 단순한 이야기를 말하려고 그는 "청춘-그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자신의 신화를 서술하려 하는 것인가? 그도 이제 나이가 들어버린 것인가? 낡은 양식을 때려부수고 부단히 새로운 양식을 실험하던 그도 이젠 창조정신이 시들어버린 것인가? 물론 그가 그 단순한 진리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목적은 그 속에서 만들어지고 특성화된 자기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권여현이 자기의 이야기를 말하기 시작했을 때 필자는 반가왔다. 그 동안 간혹 어머니의 이야기나 자신의 이야기를 화면에 서술한 적이 있지만 그 동안 권여현은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주로 자기 이외의 이야기로 본질에 접근했다.

권여현은 욕심이 많다(필자가 보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는 역사, 사회, 문화, 종교, 성(SEX), 과학 등의 제현상을 통해 자아와의 연결고리 찾고 자아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규명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권여현의 화면은 항상 소란스러웠다. 수많은 등장인물들과 사건들이 화면 위에서 서로 얽히고 섥혀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 했으니까 말이다. 그는 이 표현을 위해 이미지들을 끌어모았다. 주변의 신문이나 잡지에서부터 뇌의 구석구석에 저장되어 있는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닥치는대로 수집하였다.전쟁,고문,기아,고대유적,동성애,사랑,선교... 온갖 세상사가 그의 화면 위에 소집되었다. 그는 그렇게 십여년을 작업해왔다. 그러나 어찌보면 그것은 굴절된 역사와 모순된 사회 속에서 수십여년을 살아온, 그래서 할 말이 많았던 젊은 화가가 표현의 자유가 확대된 80년대 후반 한바탕 질러 보고 싶었던 긴 외침이었을 지도 모른다(아마 그러할 것이다.)

이제 그는 본격적으로 자기의 이야기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화면 위에 어떻게 자신의 신화를 서술하는가? 권여현의 신화는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신화는 과거 언젠가 그의 주변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이다. 대부분의 지난 신화가 그렇듯이 권여현의 신화는 사진에 담겨있다.사진은 그의 신화가 실재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권여현은 이번 전시회에서 자신의 신화를 서술하면서 많은 사진을 등장시킨다. 그러나 이 사진들은 단순히 신화를 증명하는 수단으로 도입된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누구인가?" 그 질문에 다가서는 방법으로 나는 드로잉을 택했다. Draw는 무엇으로부터 정수(Essence)를 끄집어내는 것이고, 드로잉은 그 행위의 전체과정이므로 직접적이고, 날 것이고, 시간성이 중요하며, 순수성이 탈색되기 전에 고착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마치 생선회와 같이 싱싱하고, 순수하고, 직접적으로 대상과 대면하는 매카니즘이다. 나는 이러한 생각으로 사진의 방법을 택했다.

과거부터 화가들은 추상적인 구상을(아이디어)를 화면에 드로잉으로 구체화했다. 그런데 이 드로잉은 즉발적이지가 못하다. 순간적인 뇌의 연산작용을 통해 손으로 전달되는 명령이 손으로 수행되는 과정에서 왜곡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는 순간적인 연산능력에 한계가 있어 특징적인 측면밖에는 인지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이미 그 실례를 인상파의 미술에서 확인한 바 있다. 자연 드로잉은 현장감이 떨어지고 신선도가 약하다. 사진은 현장감과 사건의 신선도를 유지하는데 더 없이 적합한 매체라고 그는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계적인 사진의 눈으로 신화를 모두 기록할 수는 없다. 기록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바로 기록된 것들 이면이 이야기들이 그것이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 서술자의 살이나 피, 뼈 속에 녹아 있는 그러나 발작적으로 수시 때대로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무형의 에너지를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그의 가슴 속에서 피 속에서 녹아 끈적끈적해진 과거의 퇴적물을 마치 추상표현주의적 표현기법으로 캔버스의 한 구석에 쏟아부어 신화의 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그의 신화는 이렇게 다양한 기법과 내용들이 결합되어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권여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본다. 그가 우리에게 풀어 보여줄 신화 보따리에 담겨진 그의 새로운 작품들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