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죽기 아니면 그림그리기” - 그의 첫 개인전(1988) 서문에 쓰여진 글귀다.
이후 권여현의 행보는 아마도 이 잠언적인 문장을 그대로 실천해 보이는 삶이었던 것 같다. 놀라운 작업량과 뛰어난 기량, 화가라면 당연히 지녀야할 감각과 테크닉, 재능가ㅗ 성실한 노동이 그대로 화폭속에 들러붙어있는 그의 그림은 너무 많이 그려내는 것 같은, 오로지 손에 익을대로 익은, 표현해내고 맛을 내는 감각에 흠씬 빠져있는 데서 오는 황홀한 도취와 관성의 나른함같은 것까지 동반해서 맛보게 한다.
사실 모든 예술작품은 자기를 알아봐 달라는 투정이고 제스쳐이다. 권여현의 작업을 보면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한 나르시시스트로서의 자기 현시의 욕망과 화가로서 자신감에 따른 표현과 재능의 노출에 걸려있다고 보인다. 시각적 효과 및 감각적 관능과 뛰어난 재질감 , 테크닉 등을 마음껏 과시하고 있음을 본다. 동시에 그의 화면은 무언가 의미심장할 것 같은 내용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화면은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시지각과 감각이 마음껏 허용함을 보는 것이다. 강력하고 충격적인 동시에 자극적인 시각이미지에 둘러쌓인 우리들의 실제 공간, 세계의 모습이 이렇게 화면과 대등하게 유지하는 경우는 오로지 권여현의 작업 이외에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최근 젊은 작가들의작업이 한결같이 그럴듯한 ‘벽’들을 만들고 인테리어적인 감각을 구사해내는 데 열중하고 있긴하지만 권여현의 경우처럼 추상적인 효과가 다채롭게 구사되는 화면을 바탕으로해서 이미지와 형상들의 탁월한 연출의 조화를 풍성하게 일구어주는 이런식의 화면경영은 찾아보기 어렵다.
화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면적에 추상적이 맛과 효과, 다채로운 질감이 상다히 감각적으로 구사되고 나면 그 위로 온갖 기호와 형상, 사진 복사물, 원과 막대, 깔대기와 점선 등이 얹혀진다. 그림이 전해주는 시각적 쾌락과 , 그림을 읽어나가게 하는 묘미 및 인간사의 모든 문제가 빼곡히 들어차 있는, 그래서 기법과 장식적 효과, 진지한 주제의식같은 것까지 모두를 충족시켜주는 듯한 이런식의 화면경영이란 보기 드문 경우이다. 외부의 그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연상시키는 그림, 현란하고 걷잡을 수 없는 감각과 사고의 회전을 숨가쁘게 몰고가는 그림이다. 어떤 속도감, 흔들림, 빛의 산포같은 효과 그래서 영화 스크린을 대하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동시대 젊은 작가들이 부분적으로 그의 그림의 효과를 원용하고 흉내내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권여현 역시 동시대 작가들의그림에서, 아니 동시대의 모든 시각이미지 전반을 자기 그림 안에 불가사리식으로 소화해내는데 놀라운 솜씨를 보이고 있다. 그의 그림은 그래서 한편의 전쟁터, 저쟁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물감과 붓만을 가지고 세상의 모든 이미지를 자기 화면안에 소유해 버리는 전투, 그 이미지포식과 모든 기법과 효과를 소화해내는 전쟁터, 그것은 이미지가 과포화돈 이 세계에서 그 이미지를 거부할 수 없는 동시대인들의 이미지 수용이 한 방식의 회화로도 보인다. 영화적 영상기호에 대한 매혹과 이미지 사냥꾼으로서의 도시젊은이들의 미적 감수성의 표출과도 맞닿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이미지만을 소유하고 거래하는 세계, 그 이미지 세계의 인간관계인 것이다. 이미지의 욕망, 이미지의 문명, 모든 것을 눈으로 보아야만 확인할 수 있는, 있어야 하는, 그래서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보이게 만들고 소유할 수 있다고 믿는 이 낙원 같은 현대세계의 모습, 이 도시공간에서 사는 모든 이들의 , 기표의 유희에 물든 시각구조로도 보인다. 그러나 이때 그 이미지는 온전하게 이해되고 자기 것이 된게 아니다. 다만 그것들은 이렇게 부유하고 떠돌다가 우리들의 신체와 감정에 전율처럼 다가와 뼈속 깊이 스며들다가 악몽처러 빠져나간다. 스폰지처럼 우리들은 그 이미지를 받아들인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는 죽는다. 용케 죽지 않으면 정신분열증에 시달릴 것이다.
2. 권여현의 회화가 이미지중독에 걸린 이 시대에 회화의 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상황속에서 자기 몰입, 도취가 되어 미끄러지고 있는지가 우리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아직도 평면회화가 가능한 지점에 대해 그가 전해주는 진정한 요소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의 회화는 볼거리와 대중매체가 쏟아내는 이미지홍수를 정신분열증적으로 포획해내는 강박의 표현인지 혹은 진정한 자아의식의 해명을 회화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드러내려는 치열한 자의식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인지도 궁금하다. 실상 그의지금가지의 모든 작업은 다름아니라 “자아의 의미” 또는 “WHAT IS I ?"였다. 역설적으로 그는 자아를 자신을 찾아 헤매이는 과정을 솔직하게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밀폐된 실내공간에서 시작해 역사와 문명적인 차원으로 나아가 현실계와 과거의 시간대가 한축으로 조우하는 선상에서 자신을 찾으려는 시도가 있어왔다. 최근작은 그런 과심이 보다 폭넓게 전개되어 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구 한말과 일제 식민지시대를 살았던 역사적인 인물들의 사진카피가 화면에 부착되어 있고 하단에는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 -평범하게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 무엇인가 몸을 놀려 일하는 노동이나 지극히 평범한 일과를 감당하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그 과거와 현재의 인물들이 바늘구멍을 통해 연결되어 있는데 그 중간에 자신의 시체가 매개가 되어 있다. 전에도 선을 보였지만 자아에 대한 관심이 결국 사진 작업을 통해서 자신의 다양한 변신을 보여준 것은 당연한 귀착이리라.
신디 셔먼의 다원적 자아 작업을 연상시키는 이 초상사진작업은 오히려 그림보다도 자신의 정체를 궁금해 하는 물음의 형식으로 더 강력한 것이다. 그런데 여러 다양한 모습으로 변장한 그의모습은 그만큼 불가해한 자아의 해명에 걸려있기 보다는 -그런 측면도 있지만 - 오히려 실재와 가상 / 재현이 같아지는 그 모든 혼란 그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도 같다.(사람 개인, 존재를 뜻하는 person 이란 단어가 ‘가면’을 뜻하는 라틴어 persona에서 유래되었음을 연상해 보면 재미있다.) 그런 면에서 그의 사진 작업과 회화작업은 바로 이런 판단과 인식의 중지라는 정적인 상태에서 그 모든 혼란을 한데 뒤섞어 놓고, 해체시켜 놓고 있다는 생각이다. 감각적으로 충격을 주며 주제를 전달하는 데는 다소 미흡하다고 여겨지지만 그가 그림 그리기를 통해 끈질기게 자신을 둘러싼 모든 현실이미지 / 세계/ 역사와 대결하고자 하는 의지와 그것을 탁월한 조형화에의 시도는 어쨌든 우리 시대에 보기 드문 화가의 능력 / 재능으로서 주목할 만한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