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이런 분류가 통용된다면, 권여현은 내밀한 독백형獨白型의 작가이다. 자의식의 깊은 심연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가서 의식의 심부로부터 길어올리는 그의 미적 담론들은 86년무렵의 초기작품으로부터 현재의 그것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맥을 형성하고 있다. 그는 자기현시욕에 사로잡혀서 장광설을 늘어놓는 미적 수사와는 달리, 자신의 성장을 둘러싸고 축적되었을 법한 은밀한 비밀들을 나직한 톤의 목소리로 드러내길 즐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는분명 이야기꾼이다. 그러나 똑같은 이야기꾼이긴 하되, 소설가가 일관된 스토리를 빌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것과 달리, 권여현은 자신이 화가이기 때문에 회화 고유의 형식을 빌어 분절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가 현대미술의 보편적 표현방식이랄 수 있는 추상이 아닌 구상의 형식을 빌어 자신의 미적 담론을 펼쳐나가려고 하는 데에는 이야기꾼으로서의 그의 이와같은 면모가 숨겨져 있다.
마치 속살을 드러내듯이, 그가 은밀하게 털어놓는 사적인 담론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기억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리고 또한 그것들은 궁극적으로는 그가 세계를 인식하는 하나의 통로이기도 하다. 세계에 대한 인식의 지평으로 접근하기 위한 그의 부단한 노력의 맹아는 그의 진술들속에 배태돼 있다. 가령, “나는 두가지 방법으로 나를 본다. 첫째는 나를 둘러싼 거울상으로 나를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 자신이 작은 벌레가 되어 내 몸속으로 들어가 나 자신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는 방법이다. 나 개인의 시간들을 Y축으로 한다면 Y축에 걸리는 최초의 강력한 기억들은 무엇일까? 그것들은 -학교에서 일어난 짧은 순간들, 깡통차기, 고무신들, 어떤 여학생, 고무줄, 고향의 강물범람, 눈썰매, 강가의 송사리잡기, 착한 어린이에게 주는 머리 쓰다듬기, 반장선거, 병원의 약품냄새 등등 - 수많은 단면이 이어진 연속된 역사이다. 그리고 공간에 해당하는 X축에 대응하는 요소들 -경상도 사투리, 서울대학교 운동장, 경남 합천의 교회, 압구정동의 화실, 뚝섬의 아파트, 조용한 작업실, 나를 10여년이나 보살펴준 누나의 문간방, 꽉 자여진 프라이드의 운전석 등등 - 이 금방 떠오르는 나만의 공간이다.
이것들은 나를 그렇게 선택해야만 하는 개연성을 주고 있다. 두 번째의 바둑판은 나를 둘러싼 거울상의 조합들이다. 이를테면, 나를 교육한 많은 선생님들, 책들 그리고 살아나가는 많은 방법을 가르쳐준 사회현상들, 노동자들, 교회의 설교소리들, 부모님의 굵어진 손가락, 단군신화를 강조하는 소리들 등이 아주 작은 부분의 예들이다.“와 같은 술회가 바로 그것이다.
눈치빠른 독자들은 금바 짐작했겠지만, 여기서 우리는 권여현의 미궁과도 같이 복잡한 기호와 영상들로 얽킨 회화세계를 비교적 명료하게 요해할 수 있는 단서를 포착할 수 있다. 그것은 곧 ‘거울’과 ‘벌레’로 대변되는 두 개의 메터포이다. 전자는 “나르시스트”로서의 작가 본연의 모습이고, 후자는 변신의 천재로서의 권여현의 변모이다. 그리고 이 두가지의 메터포가 구체적으로 표상된 것이 다름아닌 등장인물로서의 전경前景이라고 한다면, 시간과 공간을 의미하는 X-Y의 두 축은 일종의 에피소드요, 삽화로서 후경층後景層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 개의 커다란 요소를 감안할 때, 그의 그림들의 내용이 기실은 이 두가지 메터포와 요소들의 복잡한 변형에 다름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권여현의 회화세계에 이르는 또 하나의 통로는 그의 기질과 다소 복잡해 보이는 심리적 메카니즘을 이해하는 일이다. 이는 그의 작품 전편에 걸쳐 일관되게 검출되는 거울의 메터포나 변신의 이미지와 함께, 복잡한 굴절과 상호 융합을 통해 때로는 그의 회화를 불가해한 어떤 국면으로 몰아가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1988년 토털갤러리에서의 첫 번째 개인전을 전후한 무렵의 작품내용은 창작의 저변을 흐르는 그의 심리적 매카니즘과 기질에 대한 정보를 흘려준다. 사면의 벽으로 꽉막힌 방이주는 한계상황의 이밎([불안]), 신전으로 표상된 묵시와 우울의 그림자([던져짐-27]), 강건한 근육질의 소유자인 남자 무용수로 대변되는 힘과 탈출의 욕구([던져짐-14]), 얼굴은 작가 자신인 반면 몸은 날씬한 여자무용수의 그것으로 환치된 양성兩性의 이미지등은 이 작가의 내면세계를 형성하는 복합적인 심인心因을 드러내 주고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복잡하고 중층적인 심리적인 요인들은 화면의 정황을 둘러싸고 있는 화려하고 장식적인 색채의 스펙트럼에 휩싸여 몽환적인 분위기를 창출시킨다. 그가 자의식의 폐쇄회로를 통하여 건져올리는 이와같은 정황들은 자신을 둘러싼 삶의 휘장을 걷어 올리고 그속에 담긴 내용물을 공개하기에 이른다. 도대체 이 지독한 나르시스트의 뇌수에 담긴 내면풍경의 진면목은 과연 무엇일까? 무엇이 그로하여금 혼자서 하는 당구처럼 자폐적이고, ([형식과 내용 II])우수와 고독, 불안과 명상이 중첩된 미적 담론을 되뇌이게 하는가? 화려함과 장식성이 그가 지니고 있는 미적 취향의 한 단면이라고 한다면, 그와같은 분식扮飾의 이면에 가리워져 있는 비밀의 요체는 과연 무엇인가?
이와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은 그리 간단치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분비해낸 삶의 끈끈한 농축물과다시 그로부터 여과되어 나타나고 있는 회화적 담론들을 살펴볼 때, 우리는 어쩌면 그를 둘러싸고 있는 비밀의 휘장속을 힐끗 들여다 볼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최근의 작업내용에 있어서는 상당한 정도로 와해되고 있긴 하지만, 초기에 해당하는 권여현 작업의 요체는 자아와 현실간의 길항관계에 놓여 있었다. 이는 거의 자폐적일 정도로 자의식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려는 자아와 현실간의 끊임없는 대립과 순응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적자 생존과 약육강식 그리고 탐욕과 현세적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현실원칙앞에서 그것이 내뿜는 막강한 힘에 압도당한 섬약하고 선병질적으로 보이는 주인공이 취할 수 있는 행동방식은 그와 같은 힘에 저항함으로써 탈출을 시도하거나([던져짐]연작), 아니면 몽상이나 유희에 빠져드는 길 뿐이다.([형식과 내용]연작).
여기서 한가지 참고로 밝혀두지 않으면 안될 것은 권여현이 이와같은 인간의 실존을 둘러싼 제문제들, 예컨대 한계상황이라든가 기투성企投性, 소외따위와 같은 개념들에 관해 논급하고자 했을 당시의 화단적 정황에 관한 일이다. 주지하듯이 80년대의 사회적 상황은 급격한 정치적 격변에 휩사여 있었고, 이와같은 분위기는 당시의 화단에 현실참여의 모습으로 반영되기에 이른다. 권여현은 그와같은 격변의 흔적을 맡을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한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작가가 느끼지 않을수 없었던 고민의 잔재이리라. 그러나 기질적으로 섬약하고 여성적인 감수성마저 지니고 있었던 그는 그와같은 격변의 진원지로부터 멀리 떨어진채 방관자적인 자세를 취한다.
그가 거울 들여다보기를 즐겨했다던가, 얌전하고 폐쇄적인 모범생의 자세로 학창생활을 일관했다는 대학동료들의 증언은 귀공자타잎의 흠잡을 데 없는 그의 용모와 함께, 왜 그가 스스로를 자의식의 성城속에 유폐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공해준다.
“그로부터 2년쯤 후에 네 대하시절 이야기를 들었지 아마? 머리칼에 대한 콤플렉스로 인해 동기생들 얼굴도 잘 모를 정도로 실기실 구석에서 그저 과제물이나 열심히 매만지고 있었던 얌전하고 폐쇄적인 모범생. 그래, 실내가 오히려 익숙하고 구석진 곳이 더 편안했으리라. 그래, 네 그림은 현대인의 보편적인 소외현상보다도 네 자신의 콤플렉스에 기인하는 심리적 폐쇄성의 산물에 더욱 가까웠고 실제로 어느 정신과 의사도 그렇게 말했었다. 네 그림속에 존재하는 벽면은 바로 그 콤플렉스라고.(오병욱, 네 생각과 내 생각, 제 1회 개인전 카탈로그 서문中에서)”
그를 곁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벗의 이처럼 독백에 가까운 진술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그의 심리 저변에 흐르는 창작 매카니즘의 급소를 이 말은 날카롭게 묘파描破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강고한 현실에 대한 무력감으로부터 오는 반대급부로서의 폐쇄적 내향성이다. 그의 초기작품에 빈번히 등장하고 있는, 정면을 향한 자화상이라든지 여성으로서의 변신, 장식성을 수반한 색채의 유희, 화려한 서구취향등은 바로 이처럼 내면응시를 통한 자의식 과잉의 산물들이다.
80년대를 점유했던 권여현의 미학적 산물들이 자아를 중심으로 방사상放射狀의 형태로 뻗쳐있는 사적인 기억들과 연루된 것이었다고 한다면, 90년대에 접어들어 기울이고 있는 관심은 보다 폭너른 지평에 속하는 계기들에 관한 것이다. 무엇보다 두드러진 변화는 80년대의 화면을 구성하고 있던 원근법적 깊이감과 벽면의 분할이 90년대로 넘어오면서부터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종래에는 엄격하게 화면을 화면을 구획지었던 칸막이들이 일종의 연극무대처럼 상황성의 분위기를 가중시켰다고 한다면, 이후의 그것은 점차 평면적으로 되면서, 공간의 층위를 암시하는 사선의 교차와 함께 다양한 형태의 기호나 상징을 통한 문화인류학적 탐색의 시도로 이루어진다. 또한 그것은 그가 이제까지 지탱해 왔던 역사의식의 틀이 자아중심적인 입장을 떠나 인류전체의 보편적 지점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가 이와같은 인식에 이르기까지에는 70년대이후 급격한 속도로 파급되기 시작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이 깃들어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최근들어 그가 시도하고 있는 [산적(Kebab)]연작은 선조적(linear)인 시간관이 반영된 모더니티정신의 신봉으로부터 급속히 선회하여, 원환적인 포스트모더니티의 공간관에 대한 자신의 경사를 잘 드러내고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동양과 서양이 한 지점에서 만날 수 있다는 전제하에 피력되고 있는 그의 언술방식은 잡다한 기호와 상징,또는 도상이나 도해들이 역사적 맥락에서 차용된 고전적 인물들의 모습과 어울려 산만하리만치 어지럽게 전개된다.
물론 이와같은 그의 태도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태동하게된 근본적인 배경에 대한 이해나 그것을 바라보는 문화적 시각에 대한 일정한 틀이 마비된 상태에서 마구잡이식의 인용에 치우치고 있다는 비판의 여지가 없지않으나, 분방한 상상력을 통하여 그가 발휘하는 직관력은 때로 날카로운 예지의 빛을 발할 경우가 있다.
그가 자신의 이차원 평면에 가득 채워넣고 있는 도상의 내용들은 시공을 초월해 긁어모은 상상의 산물들이다. 니체와 장자, 바흐와 작가자신, 프로이트와 노자, 말러와 혜원의 여인상과의 평화로운 공존은 그 특유의 인용으로 패러디化 되어 나타나고 있지만, 그 도상들은 결코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그는 합리적인 사고의 틀로는 요해가 불가능한, 마치 장주의 호접몽과 같은 초월적인 경지에서 산적을 대꼬치에 꿰듯, 선조적인 시간의 주름을 잡아나간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철폐된 은밀하고도 사적인 그 공간은 곧 역사를 초역사적인 지평으로 전화시키는 계기이며, 그곳에서 비로소 동양과 서양은 만남의 교호작용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지난 8년여동안 권여현은 내면의 응시를 통하여 바깥현실을 파악하려는 자세를 견지해 왔다. 그리고 그와같은 그의 태도는 크게 구분해 볼 때, 자아중심적인 것으로부터 타자의 요인과 수용쪽으로 그 정신적 진폭을 넓혀가고 있다. 때로는 고고학적 탐색을 통해 때로는 역사적.문화인류학적 접근을 통해 세계관적 인식의 폭을 넓혀가려고 하는 그의 자세는 미술을 단지 유미적인 것의 획득쯤으로 간주하려는 국내화단의 일부관행에 비춰볼 때, 매우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한가지 바라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의 화면을 수놓고 있는 화려한 언설들이 문자그대로 관념적인 분식扮飾이나 지적 유희에 빠지지 않고 역사적인 통찰과 예지로 가득차길 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