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화가 권여현을 처음 본 것은 동숭아트센터에서 가진 그의 2회째 개인전에서였다. 키와 몸집에 비해서 넓은 어깨, 그 위에 마치 끼워 넣듯 박혀있는 거의 삭발한 듯한 그의 머리, 핏기 하나 없이 가부끼 마스크같이 창백할 정도로 해맑고 고운, 그러나 선병질적으로 보이는 얼굴에 수줍은 듯, 텅 빈듯 불투명한 표정은 기묘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인상은 그의 작품에서의 자신에 대한 나르시시즘적인 집착과 함께 한동안 기억속에 남아있었다. 이후 그와 함께 한 자리에서 나는 그가 얼굴같이 여성스럽다는 느낌을 받으며 그것이 의도적인 변신인지, 아니면 자연스레 우러 나오는 것인지 궁금했다. 한편 그의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자전적인 요소는 숙명적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의 자전적 서술을 인용해 보자.
‘나는 두 가지 방법으로 나를 본다. 첫째는 나를 둘러싼 거울상으로 나를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 자신이 작은 벌레가 되어 내 몸속으로 들어가 나 자신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는 방법이다.
나 개인의 시간들을 Y축으로 한다면, 그 Y축에 걸리는 최초의 강력한 기억들은 무엇일까? -- 학교에서 일어난 짧은 순간들, 깡통차기, 고무신들, 어떤 여학생, 고무줄, 고향의 강물범람.... 병원의 약품냄새 등등 -- 수많은 단면이 이어진 연속의 역사이다. 그리고 공간에 해당되는 X축에 대응하는 요소들 -- 경상도 사투리, 서울대학교 운동장, 경남 합천의 교회, 압구정동의 화실, 뚝섬의 아파트, 조용한 작업실등 이 금방 떠오르는 나만의 공간이다. 이것들은 나를 그렇게 선택해야만 하는 개연성을 주고 있다. 두번째의 바둑판은 나를 둘러싼 거울상의 조합들이다. 이를테면, 나를 교육한 많은 선생님들, 책들, 사회현상들, 노동자들, 부모님의 굵어진 손가락, 단군신화를 강조하는 소리들 등이 아주 작은 부분의 예들이다.’
권여헌은 지난 88년 첫 개인전에서 거의 완벽할 정도의 화법과 기량, 가령 균형있는 구도, 끈기있는 화면에의 집착, 감각있는 색채와 마띠에르, 모범생적인 묘사에다가 자아실존의 한계 상황에서 오는 불안심리와 동시에 저항과 탈출 욕구라는 의미있는 내용을 설득력있는 표현으로 결합해 화단의 주목을 끌었다. 그가 등단했던 80년대 말은 이미 우리 미술계의 추상 對 구상, 형식 對 내용, 체제 對 반체제, 모더니즘 對 민중미술의 양분 구조가 이미 기저를 상실, 와해되었을 즈음 형상과 표현의 복귀가 대두되었던, 그러나 긴장과 알륵이 이완상태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좌표와 방향이 절실히 요구되었던 때였다. 이러한 때에 독일 신표현주의의 기수였던 안젤름 키퍼와 아일랜드태생의 프란시스 베이킨을 적절히 차용, 거기에 위에 언급한 기량과 자아성찰적이고 심리적인 내용을 곁들여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 낸 권여현은 새로운 관심으로 등장한 현실의 인식을 ‘민중 미술’의 한계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고 부표하고 있던 세대들에게 하나의 돌파구를 제시해 보였다. 이렇게 화려하게 개인전의 막을 연 이래 권여현은 7년간 전시 횟수로는 크고 작은 개인전만 10회를 필두로 상당수의 그룹전에 참가하며 꾸준히 발표를 해와 이제 그의 이름은 화단에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권여현은 88년 첫 개인전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회화자제의 본질규명이나 형식미학보다는 리얼리티의 해명, 특히 현실세계를 통해 본 자아의 인식에 일관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초기의 그의 작업은 마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거의 분열증적인 복합심리의 해제인 듯 내면의 복충적인 심적 요인들을 제시하는 형상들 -- 때로는 실존현실의 한계상황내의 불안한 형상으로, 때로는 우울한 그림자로써, 혹은 저항의 힘과 탈출의 욕구의 형상으로써, 혹은 얼굴은 자신이나 신체는 여자 무용수로 대치한 양성의 이미지로--을 보색대비의 화려하고도 균형감각이 충만한 색채와 풍부한 마티에르로 장식해 다분히 꿈과 같이 환각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내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밀폐된 공간속에 던져지거나 몸부림치는 비극적인 형상들을 광대와 같이 회화적으로, 또는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기하학적으로 엄격하게 분절시킨 원근법적인 공간 구성도 질서보다는 기이한 다이나미즘을 산출, 화면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어 소외된 심리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광기를 작가는 불러내고 있는 듯하다.
2년 후의 개인전에서도 그의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의미탐구는 지속되며 미로와 같은 혼미한 공간속에 자기로 향한 성찰과 그 기억의 순환의 역사에 대한 고집은 거의 나르시시즘에 가까울 정도로 편집적이다. 기억의 고심속의 형상들은 서로 고리가 끊긴 단편들로 부유, 현실에 아무런 해답도, 문제도 제시함이 없이 ‘파스티쉐’로 그냥 잔유할 뿐이다. 92년에 이르러 그의 작업에 변화가 보이며 이 변화는 아마도 그의 미국에서의 경험이 어느 정도 작용했으리라 추정된다. 이전의 원근의 깊이감과 색면의 분할대신에 화면은 더욱 2차원의 평면에 가까워지며 그 위에 이물질들, 즉 천조각, 노끈, 동앗줄 등이 필선을 대신하여 교차하며 대체로 복잡다단한 도상들과 기호들이 어지럽게 화면을 가득 채운다. 마치 푸코가 니체의 <역사의 계보학>을 빌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초역사적인 지평을 열어놓듯이 그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모은 상상의 도상들 -- 니체와 장자, 바하와 작가 자신, 프로이드와 노자, 말러와 혜원의 미인상 -- 로 그의 화면을 메워놓고 있다. 그의 외국 경험이 자신의 응시를 통해 외부 현실을 파악하려는 그의 일관된 관심을 자아중심적인 위치에서 보다 거시적인 문화적 관점으로 지평을 열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최근의 작업 -- 93년 후반부터 약 1년간에 제작한 -- 들에서 선별할 예정이나 예술의 전당의 두개의 대형 전시실 공간을 이용, 이전의 작업도 함께 보여줄 작정으로 있어 아마도 이제까지의 작업을 총정리하는 분기점으로 의도한 전시로 간주된다. 권여현의 초기의 관심이 나르시시스가 세상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보듯, 혹은 자아분열증적인 인식에 입각해 자신의 과거와 관련된 사건이나 형상들을 거슬러 올라가 파스티쉐해 패러디화 했던데 반해 후기에 특히 이번 전시의 그림들에서는 보다 일반적인 문화와 역사의 인식으로 리얼리티의 지평을 넓혀 사랑/성, 종교, 정치/경제, 자연을 표제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자전적인 내용은 여전히 그의 주관심사로 등장하고 있어 또 하나의 유형의 연작들 <토르소>와 그와 연관된 설치작업은 이번 전시의 하일라이트다. 두 쪽(개) 혹은 네 쪽(개) 화폭의 작품들로 연결된 <토르소>연사에서는 자신의 후면토르소를 모델로 중심을 주고 중앙, 그러니까 심장에는 두 개의 뱀이 서로 꼬리를 물고 원을 그리고 있는 영원성의 상징안에 태극, 즉 음과 양이 자리하고 있다. 蛇圓 주위에는 육각형의 고리가 숫자가 그려져 있는 원색의 타원형들을 잇고 있다. 토르소를 중심으로 시계방향으로 방사형을 그리며 형상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들은 자신의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심리적, 물리적 연결 고리들이자 단편 상징물들이다. 가령 한 <토르소>에는 오장육부가 육각형 주위에 그려져 있어 팔과 토르소 외부의 착의의, 혹은 벗은 신체와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다른 하나의 <토르소>에서는 토르소 하부에 여장한 자화상과 근육질의 상체를 벗은 자화상이 각각 자리하고 있으며, 그림 윗변에 수평으로 전통의상을 입은 신랑과 신부가 좌우로 떨어져 자리하고 있다.
<토르소>에서 발전한 것이 네 쪽짜리 연작들로 이들은 내용상 <토르소>와 연결된다. 앞서 말했듯이 이 쪽만화 형식을 사용한 그림들은 네 쪽이 하나의 작품을 구성하지만, 각각의 화폭들은 서로 다른 배경과 소재를 담고 있어 분리 가능하다. 각 화폭의 배경은 이미지의 선명도, 즉 분명한 메세지의 전달을 위한듯 단색면이나 간결한 풍경 구도로 구성되었고 그앞에 하나나 둘, 많아야 서넛 인물들이나 형상이 자리잡고 이 형상들은 배경과 마찬가지로 간결하게 평면적으로 처리되어 있다. 비잔틴예수상, 신전 기등, 유태교의 제사장은 종교를, 조지아 오키프풍의 꽃잎, 성행위, 동성애등은 사랑/성의 은유적, 혹은 직접적인 상징이며 무자비한 폭력과 학살의 현장 묘사는 사회악의 징표다. 이들 장면은 힘과 지식에 의한 소외와 억압에 대한 문명비판적인 메세지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권여현의 인식 경험의 틀은 여전히 현실의 영역에 머물며 리얼리티의 배경 변화, 예를 들어 이전의 배경이 복합적이고 폐쇄된 내부 공간, 혹은 심리적 상황 공간이었다면 이제는 외부 풍경으로 시각을 전환하고 있다. 반면 권여현은 근작에서 이전보다 더 사실묘사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그리고자 하는 내용이 내면세계의 혼미한 영상과 단편들이 아니라 자신, 혹은 현실세계를 지배하는 문명에 대한 비판적인 메세지며 이를 보다 직접적으로 전달하기 위함을 의도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의 장대한 스케일, 460CM X 260CM은 바로 메세지의 시각적 효과를 감안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93년대의 작업들, 주로 돌맷돌, 혹은 깔때기의 형상화, 양식화의 시도는 여과장치로서의 기구라는 의미에서 단순한 형상에 대한 관심 이상으로 초기의 관심과 최근의 그것과의 연결고리라 할 수 있다. 부연해 자아편집적인 관심을 여과시켜 보다 보편적인 리얼리티에 다다르기 위한 인식의 도구로 깔때기를 등장시켰을 개인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으며 아마도 그 때문에 이 깔때기 연작들도 이번 전시에 포함시켰을 것으로 짐작된다. 무엇보다도 이번 전시의 하일라이트는 40M 가량의 길이로 이어진 설치작업이다.
이 작업은 일종의 퍼포먼스의 연장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는데, 먼저 그는 소방수로 복장을 한 다음 그 옷을 자신의 몸을 뜬 마네킹에 걸고 준비한 아크릴 박스에 소방기구들과 장신구를 넣어 설치한다. 이때의 소방수는 사회를 상징한다고 한다. 여장을 했다가 가발과 밍크코트, 모자는 같은 방법으로 배치하나 이때에 가발은 얼굴 마네킹에 씌워지게 된다. 이 성의 환지, 성전환은 그의 편집적인 주제의 하나다. 종교를 상징하는 목사도 소방수와 비슷한 방법으로 설치작업이 적용된다. 마지막 단계에서 그는 상반신을 벗은 것과 입은 것을 각각 찍은 사진들을 배경으로 그 앞에 차례로 세 개의 복장한 마네킹이 세워지고, 이어 장신구와 기구를 담은 아크릴 박스, 그 다음에는 자신의 앞면 토르소와, 뒷면을 투명 폴리코트로 뜬 모형을 차례로 놓은 다음, 그의 손과 발, 얼굴을 같은 재료로 떠 일렬로 진열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설치작업은 데리다적 해체 자아, 혹은 다원적 자아에 대한 그의 즉자적인 진술이며 나아가 그의 자전적인 현실해명의 연장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