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현은 1994년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의 개인전에 여성으로 위장한 자신의 사진을 전시했다. 그옆에는 사제(司祭)와 소방수로 분장한 모습과 함께 청빈과 순종, 절대자에의 귀의(歸依)등 다분히 종교적인 맹세를 상징하는 듯한 포즈로 가슴에 손을 얹고 있는 자신의 사진을 나란히 내걸고, 이러한 위장술을 위해 동원된 소품과 자신의 신체의 파편들을 바닥에 일렬로 진열했다. 이 사진작업이 그의 자전적인 타블로들과 같은 전시장에 내걸렸을 때 두 가지의 상반된 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는 그의 창백한 나르시즘이고 또 다른 것은 은폐에의 욕망, 즉 자기보호에의 유혹이다. 타블로에서 그는 자신을 구성하는 요소로 사회, 사랑, 욕구, 과학, 역사, 종교를 제시했다.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것과 사회적 환경이 충돌을 일으키는 자신의 내면을 그는 상호대립되는 이미지의 채집과 병렬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거시다. 그 과정에 그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거의 불가사리와도 같은 흡인력으로 많은 이미지들을 깔대기와 상징, 기호 등을 동원하여 빨아들였다. 사소한 개인사와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성적 욕망으로부터 사회적으로 쟁점을 불러일으킨 충격적 영상에 이르기까지 그는 깔대기란 통로를 통해 모두 흡입한 후 그림으로 다시 뱉어내었다. 그는 이것을 마치 이미지의 연금술사처럼 제련하였으나, 정작 그 자신은 이미지의 뒤로 숨어버렸다. 창백한 나르시시즘이란 바로 이러한 연속된 위장에서 발견되는 특징이다. 마치 껍질 속에 또 하나의 껍질을 뒤집어 씀으로써 더욱 나르시시즘을 강화하는 형국이랄까. 자기애의 편집적 집착은 이미지의 표출에서가 아니라 그속에 잠복된 욕망의 장치를 주목할 때 발견할 수 있다. 즉 그림의 색채에서 상징에서, 기호에서 그는 유령처럼 떠올랐다 사라지곤 하는 것이다. 이것에 비해 사진작업은 보다 도발적이다. 그것은 공개된 위장을 통해 자기를 드러낸다.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위장의 위장’이 회화의 관용적 표현에 의존한 심리상태의 노출이라고 한다면 사진작업은 직접적이고 공개적인 자기노출을 통해 자기를 더욱 은폐시키는 장치이다. 그것은 이번에 전시할 위장된 자아에서 다시금 드러난다. 그는 랩음악에 혼을 뺏긴 채 흐느적 거리고 있는 신세대와 곰방대를 물고 점잖게 앉아 있는 고전적 분위기의 사대부, 중국음식 배달원과 보디가드(또는 해결사), 광부와 군인 등으로 분장하고 전에 볼수 있던 정적인 것에서 동적인 연출을 가미했다. 이들은 모두 특정한 사회적 계급이나 신분을 상징하지만 실제로는 모조된 것이고, 의도적으로 이것이 연출임을 드러내고 있다. 위장이나 분장을 통해 자신의 신분이나 성격을 바꿔버리는 행위의 역사는 선사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문화인류학에 의하자면 종족의 보존과 번식을 위해 성역할을 바꾸는 부족도 있으며, 고대사회의 부장풍습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바꾸고자 한 욕망의 표현이었다. 신디 셔먼(Cindy Sherman)이 영화의 스틸사진을 차용하여 자아 정체성에 대해 묻는 작업을 하기 이전에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은 ‘르로즈 셀라비’(Rrose Selavy)란 사진작업을 통해 여성으로 분장한 바 있다. 문제는 분장의 형식과 그것을 누가 먼저 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왜 자기를 위장하는가에있다. 사실 권여현의 분장은 그형식에 있어서 일차원적이다. 단순하게는 다양한 계급중에서 대표성을 띤 표본을 추출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위장은 또 하나의 속임수인 것 같다. 일전에 발표한 여장(女裝)한 사진에 비해 이 사진작업에서 권여현의 실체는 증발했다.
이 사진작업은 ‘기표의 기표’이면, 인용을 통해, 즉 이미 말해진 방식을 통해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실제로는 자신을 감추는 트릭이고 이중위장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사진을 통해 권여현의 모습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그가 꾸며놓은 덫을 용인하는 꼴이 된다. 여기에 권여현은 없다. 단지 그 그림자 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속에서 권여현을 찾으려고 한다. 이 아이러니가 바로 권여현이 노리는 바다. 일전에 나는 한 시사잡지의 리뷰를 통해 권여현의 회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 중의 하나로 ‘여백공포’(horror vacuum)를 든 바 있는데, 이 사진작업을 보면서 그가 여백공포만큼이나 자기노출공포-모든 수줍음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를 가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크면 클수록 의식적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연출행위를 통해 정작 자신은 더 깊숙한 곳으로 숨어버리는 것이다. 결국 연출된 자아란 자아의 파편이고 그것조차 거북이의 등처럼 견고한 위장막이다. 따라서 권여현의 작업이 편집적인 것도 상처입기 쉬운 자아를 보호하고자 하는 심리를 문화적, 사회적 장막으로 덧씌우고자 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업에 빈번한 차용의 흔적도 이런 것에서 기인한다.
이 사진작업과 함께 그는 요즈음 바늘구멍을 통해 바라본 자아를 그리고 있다. 깔대기가 대상을 흡입하는 도구라고 한다면, 바늘구멍은 마치 카메라 옵스큐라의 그 작은 구멍을 통해 피사체를 포착하듯 그가 자아와 세계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하고 확고한 창구이다. 화면은 마치 암호나 기호처럼 화면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카메라 옵스큐라의 도형을 중심으로 구성되고 있다. 이 바늘구멍을 통과한 피사체의 영상은 상자속에 거꾸로 맺힌다. 정신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들의 초상사진, 수신호(手信號)를 주고받는 인물들의 기호화된 표현등 서로 상관이 없어 보이는 듯한 이미지들을 결합하는 방식은 과거에 그림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즉 그는 바늘구멍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수용하며, 이해한다. 바늘구멍은 사회로 향해 기웃거리고 있는 그의 시선이자 마음이며, 은폐된 위장막을 통해 세계를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작은 구멍을 통해 대상을 받아들이는 카메라 옵스큐라에 붙여진 이름 중의 하나가 ‘빛의 운반자’(phosphorous)인데, 권여현의 바늘구멍은 자아와 세계가 매개하는 일종의 ‘자아의 운반자’와 같은 것일까. 사회로 나가고 싶은 욕망만큼이나. 스스로 유폐를 즐기려는 욕망 또한 강하다. 그 욕망의 대립 속에서 그는 여전히 자신을 폐쇄된 나르시시즘의 골방에 방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