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서양 넘나드는 자기애의 그림

이주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개인이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아마도 자가 자신일 것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도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과의 관련 정도에 따라 비중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인간은 타고난 나르시스트다.

그러나 이런 ‘자기 중심성’이 없었다면 인간은 지금과 같은 문명과 문화를 창출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토대로 과학과 예술, 종교 등이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진화, 발전하며 역사를 따라 흐를 수 있었고 무수한 투쟁과 사랑, 건설과 파괴가 그 물결의 반사빛으로 비늘처럼 수놓아질 수 있었다.

이런 인류의 일반 특성에 비춰서도 너무나 자기 중심적인, 또 이기적인 인간 존재가 예술가들이다. 뛰어난 예술가들은 선천적으로 자기애가 강하다 그런 만큼 사회도 나르시시즘에 상당히 관대한 편이다. 학교의 도덕 시간에 배우는 ‘이타적 인가’과 ‘이기적 인간’의 선악 이분법적 구별은 그러므로 이들에겐 통하지 않는다. 부지런한 개미보다는 게으른 베짱이가 오히려 뛰어난 예술적 성취를 이룬 경우가 많음을 우리는 예술사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인간의 이기적 본능이 결코 인간사회에 해가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존재가 바로 예술가들인 것이다.

10월 5-16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과 종로구 인사동 화랑 사계에서 개인전을 갖는 권여현(33) 역시 상당히 자기애가 강한 화가이다. 그의 자신에 대한 관심은 자신을 자랑하거나 나서서 꾸미는 과시적인 형태보다는 ‘나는 무엇인가’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또 무엇인가‘등의 상당히 탐구적인 질문 형태로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나는 두가지 방법으로 나를 봅니다. 첫째는 나를 둘러싼 거울의 상으로 나를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 자신이 작은 벌레가 되어 내 몸속으로 들어가 나 자신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는 것이지요.”

권여현이 선택한 이 두가지 방법은, 사회적 존재로서 자신의 위상을 자아와 환경과의 관계를 통해 긍구해 보는 다소 외향적인 방식과 스스로를 대상화해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 감성과 이성 등을 자신 내면의 시각으로 해부해 보는 다소 내향적인 방식을 함께 아우른 것이다. 지금가지의 작업방식이 후자에 가까웠다면 최근 들어서는 점점 전자 쪽으로 작품 경향이 바뀌어 가고 있다.

그 동안 한 마리의 벌레가 되어 자신의 몸속을 헤집고 다니면서 이젊은 작가가 발견해낸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남성으로서의성적 정체성을 드러내 보이는 다양한 유형의 인가들(그들은 대체로 권력 또는 소외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자신을 낳아준 어머니, 유며한 동서양의 지성들, 엄숙한 제의를 진행하는 고대 제관들, 작가의 욕망을 투사한 듯 한 여체, 자신과는 다른 성적 정체성을 대표하는 우아한 포즈의 발레리나, 그리고 인류의 각종 지혜와 지식을 암시하는 기호 등이다. 결국 그의 몸은 하나의 생물적 개체이기 이전에 지금까지 진행돼온 인류 역사의 집적체이자 그 무수한 복제물 중 하나였던 것이다. 정신 분석 학자 융이 말하는 ‘집단 무의식’같은, 인류의 무수한 경험이 쌓이고 유전돼온 결과로서의 정신적 실체를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자아의 본질과 역할은 과연 어떤 것일까? 작가 자신도 혼란스러워 하며 던지는 이같은 질문에 대한 답은 그러나 쉽게 구해지지 않는다.

이런 그의 그림에 대해 주위에서는 그 동안 ‘너무 서양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일년 정도 머물면서 작업할 때 주변 작가들은 그의 작품에 ‘상당히 동양적’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내렸다. 한국에서의 평가는 그가 보여준 이미지가 서양풍이라는 데 주로 의존한 것이었고, 미국에서의 평가는 그의 그림이 띠고 있는 강한 관념적 의식 전개만을 너무 의식한 것이었다.

이 점에 비춰보면 그의 그림에는 ‘유類적 존재’로서 인간 전체와 한 개인의 갈등뿐 아니라 동양과 서양이라는 문화간의 대립 내지는 갈등 또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나는 어떤 뚜렷한 입장을 가지고 내 자신의 작품을 완결 지으려 하지 않아요. 마치 일기를 쓰듯 매일 생활 속에서 접한 사실들을 화폭 위에 기록합니다.”

자신에 대한 탐구가 너무도 복잡다단한 혼란의 확인으로 끝난 이상 권여현은 이를 어떤 분칠로도 왜곡하고 싶지가 않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표현하며 그 정직함에 기대 앞으로의 예술적 성취를제고할 수 있길 희망하는 것이다.

이런 분열적 자아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는 태도는 상당한 용기와 고집을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권여현은 이른바 ‘사회과학주의의 시대’ 에 학교를 다니고 작가로서의 기반을 다진 세대로서 심리상 당시의 여러 가지 상황적 억압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겠으나 자신의 취향과 욕구에 대해서 만큼은 그 어떤 이기적 예술가 못지 않게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학창 시절 그의 그같은 자신에의 침잠을 지켜본 한 친구는 그에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머리카락에 대한 콤플렉스(권여현은 나이에 비해 일찍 머리숱이 줄기 시작했다.)로 인해 동기생들이 얼굴도 잘 모를 정도로 실기실 구석에서 그저 과제물이나 열심히 매만지고 있었던 얌전하고 페쇄적인 모범생. 그래, 실내가 오히려 익슥하고 구석진 곳이 더 편안했으리라. 그래, 네 그림은 현대인의 보편적인 소외 현상보다도 네 자신의 콤플렉스에서 기인하는 심리적 폐쇄성의 산물에 더욱 가까웠고 실제로 어느 정신과 의사도 그렇게 말했다. 네 그림 속에 존재하는 벽면은 바로 그 콤플렉스라고.’(오병욱 ‘네 생각과 내 생각’)

권여현의 침잠이 그처럼 꼭 개인적인 콤플렉스에 기인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릴 수 있으나, 바로 이같은 침잠에 기대 그는 84년 창작미협 공모전 대상, 86년 동아미술제 동아미술상, 90년 중앙미술대전 우수상, 91년 석남미술상 수상 등 화려한 경력을 쌓으며 작가로서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확실히 권여현의 모습에서는 일종의 우수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가 검정 코트에 검정 모자를 쓰고 마치 20년대 유럽의 방황하는 지식인 상을 연출한 듯한 사진을 보면 그 우수의 냄새는 더욱 스산한 바람으로 다가온다. 노천명의 ‘사슴’처럼 매우 귀티나는 이 젊은 작가는 (사진 기자는 그가 매우 포토제닉 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흰 피부로 인해 더욱 서구적인 인상을 풍기는데, 바로 그런 배경들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집요한 탐구를 하도록 의욕을 불러일으켰는지도 모른다.

권여현이 최근 파고드는 작품들은 기왕의 내면 탐구로부터 반사적으로 퇴튀어나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내면에 맺혀 있는 상을 한 화면에 혼란스럽게 나열하지 않는다. 얼핏 자아에 대한 관심은 줄고 세계에 대한 관심이 전면에 등장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세계에 대한 그 그림들도 종내는 그 자신에 관한 이야기로 귀결된다.

그의 요즘 작품은 4개의 캔버스가 모여 한 화면을 이루는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각 캔버스에는 종교.사회.역사.성.사랑.과학 등 6가지 주제 중 하나가 일반인에게 친숙한 이미지로 그려져 있다. 이미지가 친숙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가 잡지나 책 등에서 그림을 위한 이미지를 곧잘 따오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서 중요한 부분은 그가 이들 주제나 이미지를 대상화해 그렸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친숙한 주제와 친숙한 이미지가 그, 또는 관람자 개인이 늘상 접하고 겪어 온 것이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것은 그 개인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느 사실이다.

곧 권여현이 지금 관심을 갖고 그리는 것은 자신을 구성하는 요소이되 그 힘의 근원이 외부에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외부적 세계의 이미지들이 그에게 대부분 서구적인 것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가 꼭 서양화를 그려서가 아니라 종교든, 역사든, 사랑이든, 과학이든 모든 주제의 상당 부분이 서구의 것 또는 서구의 시각을 거친 것이라는 점은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물론 이와 관련해 그가 사용하는 잡지 등이 대부분 서양의 것임을 우선 염두에 두지 않을 수없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 그의 시각 전체를 서구적인 것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의시선 속에는 보편적 세계를 향한 끊임없는 정신적 추구가 있고 그것은 매우 동양적인 특질을 갖고 있다.

이런 지속되는 분열적 양상은 어쩌면 일종의 도착증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분명히 엄존하는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권여현의 세대, 한국의 30대는 바로 이같은 분열로 인해 가장 긴박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는 부류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전 세대처럼 과거의 주문에 더 이상 붙잡혀 있기 어려울 만큼 전통으로부터 멀어져 있고 또 급격한 국제화의 초입에서 서구의 것에 대해 더 이상 자존심만을 내세워 백안시할 수도 없는 위기를 맞고 있다. 신세대처럼 편안히 시대를 타고 시대를 즐기기에는 뭔가 찜찜한 과거의 부채를 안고 있는 ‘마지막 기성세대’가 그들이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결국 이들 역시 대세를 크게 벗어날 수 없다. 이제 한국인의 정체성 찾기는 더 이상 과거에 매일 수 없고 미래 지향적인 관점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그림이 조용히, 그러나 힘주어 이야기하는 진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