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티’의 해명은 권여현의 끝 없는 주제이다. 그동안 그의 작품들 속에서 보여졌던 시간이나 공간, 존재, 그리고 각종 현상들에 대한 그의 집요한 탐구는 결국 리얼리티를 해명하기 위해서 거쳐야만 했던 일련의 통과 절차였다고 하겠다. 끊임없는 물음과 응답을 통하여 그가 잠정적으로 도달한 결론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자아에 의하여 의미를 부여받게 되고, ‘리얼리티’란 결국 자아에 의하여 걸러진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그의 태도는 자연히 이전의 역사 파악방식, 특히 근대 이후의 기계론적 세계 파악방식을 철저하게 부정하게 된다. 그는 우선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의 방향성만을 가지고 흐른다는 연속적인 시간관을 부정한다. 시간은 연속체로서 이어진 것이 아니라 무수한 시간의 점(사건)들의 나열에 불과한 것이고, 그것들을 연계시키는 것은 인간의 관념에 불과하다는 불연속적인 사간관에 의햐여 현상을 파악하게 된다. 그와 같은 연속체로서의 시간관의 부정은 그의 이전의 작품들 속에서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공자나 프로이트. 호킹. 아인슈타인 등 수많은 사람들과 각종 사물들을 서로 아무런 연계성도 없이 동일한 화면공간 속에서 나열하게 된다. 시간의 연속성을 인정하지 않는 권여현의 같은 리얼리티의 파악방식에 근거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작품들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깔때기는 수 많은 현상들 속에서 새로운 리얼리티를 걸러내는 여과기이다. 즉 그의 그림속에서 깔때기는 새로운 리얼리티를 만들어 내는 ‘주조틀’로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가진 고전적 절대 시.공간의 관념은 이미 파기되어진 지 오래이다. 우리는 그동안 일상적 시.공간 속에서 모든 현상을 인과론에 의하여 파악하는 데 익숙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즉 어떠한 결과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원인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신념말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우리 앞에 놓여진 현상 속에서는 그와 같은 원인과 결과가 명확하게 구별되지가 않는다. 현재의 한점(결과)이 과거의 어느 한 점(원인) 때문에 발생하였고, 그것이 미래의 어느 한점(예상)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믿음은 사실은 자기가 속한 시대의 문화와 지역성 및 개인적 가치관이나 체질등에 상당히 좌우되기도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은 인간의 역사라는 것이 역사가에 의하여 하나의 사건에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느냐 또는 하지 않느냐에 따라 역사적인 사건이 되느냐 아니면 무의미한 사건으로 남느냐가 결정되는 것에서도 잘 알 수가 있다.
그러면 그의 리얼리티의 파악방식과 그것을 표현한 표현방식은 비판 없이 수용될 수 있는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해서는 반드시 긍적적인 답변은 할 수가 있다.
그의 화면 공간 속에서 뒤죽박죽 배열되어 등장하는 무수한 이미지들은 하나 하나 읽어나가는데 있어서 커다란 어려움은 없다. 그것들은 각자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얽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지를 하나하나를 읽을 수 있다고 그의 그림이 전체적으로 해석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작품의 해석은 화면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요소들의 관계로서 파악이 되게 되는데, 특히 배경(주로 공간)이 그의 화면공간에는 어느 시 공간임을 알 수 있도록 하는 아무런 암시도 없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이전의 작품들 속에서 등장하느 깔때기 역시 화면 속에서 등장하는 여러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물기호로서 이해될 뿐이지, 그가 주장하듯이 리얼리티를 걸러내는 도구로서의 기능의 의미는 없다고 보여진다.
이번 전시회에서 그는 이전의 리얼리티 여과기로서의 깔때기에서 벗어나 화면이라는 추상적 공간 속에서 깔때기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물론 그의 의도는 분명히 깔때기의 단순한 사전적 의미를 넘어선 깔때기의 리얼리티를 해명해보기 위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이번에 등장하는 깔때기 역시 구체성을 상실한 추상적 공간 속에서 놓이게 됨으로써 그가 밝혀내고자 하는 일상적 구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그의 작품들 속에서 보게되는 것은 결국 조형적인 문제로서 귀결이 되게 한다.
그러나 이번에 다루고 있는 갈때기의 이야기는 그의 작품경향이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의 관심은 여전히 현실속에서 리얼리티를 해명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의 귀착점이 그 자신만의 관념적 세계이거나 또는 증명할 길 없는 허무한 결론에 도달한다고 해도 그는 그 길을 갈 것이다. 인간의 위대한 발견은 모두가 그러한 리얼리티를 찾아가는 도정에서 얻어지는 부산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