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맷돌 (무엇을 위하여/비논리적 삼각형)

윤진섭 (미술평론가)



1991년 말을 전후하여 권여현은 약 1년간 미국에 체류한 적이 있다. 그때를 기점으로 하여 그의 작업에는 조용한 변화가 찾아든다. [물맷돌 Water Millstone]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거친 삼베로 된 이 생활도구는 문자 그대로 맷돌에 물을 공급하는 용도로 고안된 것인데, 깔때기 모양의 그것은 독특한 방식으로 매듭지워진 끈에 의해 천장에 매달려 사용된다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권여현은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지역에서 사용되는 이 도구를 자기작업의 주요 모티브로 삼게 된다. 캔버스에 부착된 오브제 형태나 아니면 직접 설치 형식으로 제시되는 이[물맷돌]작업에서 역시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는 것은 선적인 요소이다.

 

크리스토의 포장작업(Wrapped Work)에서 매듭의 방식이 중요한 것처럼 권여현의 작업에서도 역시 묶는 방식은 매우 중요한 요소로 간주된다. 필자에게 있어서 이 묶는 방식에 대한 궁금증이 풀린 것은 '93년 금호미술관에서 가졌던 개인전에서 였다. [아버지의 아들 Son of father]이란 설치작업은 필자가 이점에 대한 궁금증을 풀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I]은 4장의 사진(그중 2장은 확대된 것)과 두 점의 초상화, 그리고 군용 야전의자와 배낭 및 군용 사물함 따위가 제시된 설치작업이다. 아버지의 군대시절 사진과 개인용 사물을 제시함과 동시에 작가 자신의 유년시절의 사진을 병치시킨 이 작업은 부자지간에 발생하는 근친성(近親性)을 놀라우리 만치 생생하게 보여준다. 아버지의 배낭 속에 나타나고 있는 끈의 매듭방식은 이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서 보여준 묶는 방식과 유사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그가 제시하고 있는 두 장의 사진(하나는 아버지, 하나는 작가 자신)에서 나타나고 있는 포즈의 유사성과 전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 우연을 단지 우연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30여 년의 세월을 산적꼬치처럼 꿰어 오늘의 현실 앞에 제시하고 있는 권여현의 이 기민한 상상력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외화(外化)로 화면에 나타난다. [아버지와 아들 I]에서 30여년전 한 무명의 초상화가에 의해 그려진 어머니의 젊은 시절의 초상화는 아버지의 초상화를 중심으로 작가 자신의 유년시절의 사진과 함께 직각으로 배치됨으로써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와같은 사실은 [어머니의 세계]에서처럼 어머니가 등장하는 그의 많은 작품들 속에서 유독 그의 부친을 찾아 볼 수 없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는 부친대신 그 자리에 자신의 모습을 그려넣음으로써 부친을 거세시킨다. 그는 프로이드에 의해 남성 생식기의 상징이 된 중절모를 쓴 자신의 모습을 어머니와 함게 화면에 병치함으로써 힘의 상징으로서의 아버지를 밀어내고자 애쓴다. 그가 유달리 중절모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여성성feminity에 대한 보상심리일런지도 모른다. 부드럽고 내향적인 여성성(女性性)은 강건함의 상징으로서의 모자와 결합됨으로써--프로이드의 [꿈의 해석]에 의하면 모자는 성교(性交)를 의미한다.--심리적으로는 남성성(男性性)을 획득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근 10여 년에 걸쳐서 한 내밀하고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가 일궈 놓은 은밀한 사적공간의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미궁처런 난해하고 난수표처럼 해독하기 어려움 세계임이 분명하다. 내가 더듬거리며 겨우 빠져나온 컴컴한 이 터널은 새로운 비평적 잣대로 해석할 수 있는 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남성과 여성, 어둠과 빛, 삶과 죽음, 동양과 서양 등 이원론적인 등식에 따라 직조되고 있는 권여현의 회화세계는 늘상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성큼 다가서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