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총체적인 그림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옛날 물건, 현대의 물건을 같이 그려 놓음으로써 시간도 같이 한 그림 속에 넣어 놓고 여러 면의 인물을 합성시켜서 다원적인 자아를 그려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권여현은 1986년 작업 초기부터 부유하는 자신의 실존적 ‘자아'의 문제를 한계상황에서 오는 불안심리에 대한 저항과 탈출욕구의 대비에서 오는 긴장을 집요하게 추적해 온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99년 개인전에서 “개인의 내면,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개인과 국가의 관계를 규정한 그림을 통하여 한 사람의 자아가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생각해 보는 그림을 지속적으로 그려왔다”고 고백한다. 세상은 이미 바꿀 수 없는 결정된 객관적이고 우연한 사실에 의한 상황이지만, 작가는 그래도 이 상황에서 끊임ㅇ벗이 ’선택‘을 해야 하는 ’존재의 이중성‘에 대한 고민을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한 자신의 이미지를 작품 속에 투영함으로써 풀어 나간다. 그의 수많은 자화상은 작가의 내적인 자유와 살아있는 유연성을 보여 줌으로써 가장 미묘한 타자의 움직임 속에서 그의 심리적 실체를 추적할 수 있는 단서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권여현은 두 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본다고 한다. 첫째는 자신을 둘러싼 거울상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작은 벌레가 되어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가 자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는 방법이라고.
오랜 시간 한 가지 주제에 몰두하는 그의 작업태도와는 달리, 권여현은 작품을 위한 새로운 표현방식에는 민감하리만큼 순발력이 잇는 작가다. 그의 1988년 첫 개인전에서 드로잉
․ 페인팅 ․ 입체 ․ 설치 등 거의 완벽할 정도의 화법과 기량으로 화단의 찬사를 받았다. 그리고 최근의 2002년 개인전 <부유자아(浮遊自我)>에선 퍼포먼스 ․ 비디오 ․ 사진 ․ 회화 ․ 조각 ․ 설치 등 표현 가능한 조형언어를 최대한 활용한 작가 특유의 자유분방한 정신을 표출했다. 이 글에서는 권여현의 두 가지 대립되는 양면성, 즉 개인의 무의식에 잠재한 극도의 심리적 불안이나 내적 고민과 현실세계를 지배하는 문명에 대한 사회적 비판을 기호와 상징으로 표현된 퍼포먼스, 사진 그리고 회화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존재의 이중성과 다원적 자아
퍼포먼스 <표상(表象)의 시대>는 그의 제자 8명 그리고 그의 애완견 ‘각(覺)’이와 함께한 2002년 개인전 <부유자아전> 오프닝 하이라이트였다. 어디선가 귀에 익은 1980년대 팝송 ‘epitaph(묘비명)’가 스피커를 통해 실내에 울려 퍼지고, 지도자로 분장한 권여현이 천천히 무대에 나타난다. 그리고는 그는 자신의 애완견 ‘각’이에게 엎드려 절을 하기도 하고, 자신의 입은 옷을 벗어 던지는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면서 퍼포먼스는 시작된다. 이어 지도자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의 존경과 충성을 마다하고 자신의 애완견을 경배함으로써 무리로부터 추방당하고, 결국 자신의 초상과 개의 초상이 조각으로 형상화되어 전망대에 모셔지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여기서 작가는 정신이나 물질보다 이미지를 더 신뢰하는 표상의 시대, 즉 시각이미지 자체가 하나의 환경을 구성하는 현대의 문화현상과 사회적 현실에 자신을 비추어 주목한 것이다. 시나리오와 연출에 충실하고, 대사가 없는 몸짓과 배우들의 표정연기는 즉각적이고 쌍방의 반응을 유도하는 역동적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일체감을 주기보다는 철학적이고 연극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 서술적인 면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번 퍼포먼스에서는 일상을 같이하는 제자들과 사제지간의 격을 넘어서 작가와 작가로서 이루어 낸 내면적 연기호흡은 작가의 삶의 체취를 느끼게 했다. 여기에는 가벼운 전략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최근 화가들의 내용 없는 일회적 퍼포먼스에서 볼 수 없는 진지함이 내포되어 있어 그 의미를 더한다. 한편 정치적 ․ 사회적 문화현실들을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선험적 기호로 받아들이는 그의 문화와 역사의 인식에서 비롯된 자전적 내용의 서술적 구성은 1998년 개인전 <청춘-그 아름다운 시절>의 작품들에서도 나타나 있었다.
데리다의 해체적 자아 혹은 다원적 자아에 대한 권여현의 자전적 사진 작품으로서 1994-6년 <얼굴>, <X세대>와 1997년 <거지>, <힘든 역사>, <강제징병>, <시위>, <사춘기-2>, <북맨> 등이고, 2001년에는 <무당>, <넷 맨(Net Man)>, <화투맨>, <저승사자> 그리고 <신인류>등이 있다. 이 작품들은 퍼포먼스의 분장으로서 작가 자신이 다양한 사회적 역할로 변장하거나 혹은 자신의 양성적 이미지를 사진에 담아내는 작업이다. 작가는 다중적 인격체로서 자신의 욕망과 무의식을 노출증에 가까울 정도로 드러내 객관화한다. 우선 작품 <무당>에서는 권여현이 무당 의복을 입고 마치 말이란 틀 속에 억눌린 자신의 내면세계를 해부라도 하듯이 이승과 저승,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현실과 가상을 왕래하며 이질공간을 이어주고 중재하는 굿의 주관자로 역할을 전이하여 자신의 무의식에 잠재해 있을지도 모르는 샤먼적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미 그의 1994년 작품 <얼굴>에서 모피를 입고 입술에 빨간 루즈를 칠한 여성으로 변장하여 작가의 양성적 이미지를 통해 성적 정체성 문제를 제기한다. 사실 미술사에서 젠더 문제를 제기한 최초의 인물을 마르셀 뒤샹이다. 그는 1921년 작품 <로즈 셀라비(ROSE SELAVY)>에서 모피를 두르고, 진한 화장을 하고, 가늘고 긴 손가락이 화려하게 보이는 화류계 여자처럼 변장했다. 그리고 그것을 친구 만 레이에게 사진으로 찍게 했다. 뒤샹은 자기 내면에 있는 또 다른 자신인 여성적 자아를 드러내고, ‘장밋빛 인생’이라는 뜻의 ‘로즈 셀라비’를 이름으로 만들어 자신의 글과 작품에 서명했다. 뒤샹은 자신의 여성적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이성의 옷을 입었고, 이는 1970년대 이후 많은 작가에게 이성의 옷 입히기라는 새로운 미술의 길을 여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성의 역할과 속성을 바꾸는 것을 포함하여 변장과 이성의 옷 입기를 다양하게 시도하는 것은 이미 고대로부터 인류가 품고 있는 자웅동체의 꿈을 다양한 방식으로 재현하려는 표상이 아닌가도 생각할 수 있다. 권여현은 작품 <얼굴>에서 자신의 내부에 잠재된 양면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여성적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상징물들, 즉 밍크코드와 빨간색 루즈, 퍼마 머리라는 회적 ․ 문화적인 여성 코드를 통해 자신의 성적 정체성의 모호함을 충족시킨다. 이러한 성의 환치를 통해 그는 나르시시즘을 획득하고, 그 자신의 욕망을 주체와 객체로 나란히 설정한다. 작품 <신인류>와 <넷 맨(Net Man)>에서 작가는 미래의 인간형으로 분장하고 사진을 찍었다. 권여현의 계속되는 이러한 의도적인 변신은 본질적으로 직접적이고, 순수하고, 즉각적이고, 아무런 거리낌 없는 욕망의 표현이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내면에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이러한 심리적 충동은 아마도 현실에서 부유하는 자아의 모습이 아닐까.
권여현 작품의 진수는 역시 회화 작품들이다. 일찍이 다양한 범주와 장르를 혼합하는 권여현의 포스트모던적 작품 경향은 1980년대 모노크롬과 추상미술 그리고 민중미술 사이에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시대를 초월한 동 ․ 서양의 전통적 회화에 대한 관심, 내용과 기법에서 모더니스트의 취향을 갖고 있는 점, 그리고 암시적 서술이 내재한 것이 권여현의 작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권현은 작업의 여섯 가지 원칙을 “첫째는 견고하고 두꺼운 배경과 나중에 얇게 그려진 인간, 둘째는 부분적인 이질 추상과 전체적인 구상성, 셋째는 단계적으로 제시된 제작의 과정과 차원, 넷째는 각 부분을 이루는 적절한 다른 양식들, 다섯째는 드로잉의 원리 - 과감한 구도, 날카로운 직선, 강렬한 광선, 다른 공간들의 조합, 마지막으로 전면이질 추상은 내용과 색채에 의해 통합된다.”라고 말한다.
시공을 초월하는 심리적 회화
2002년 작품 <깔때기>, <부유자아>에서는 그의 초기 작품에서 볼 수 있었던 자신의 현실을 지배하는 과거의 경험이나 기억에 관련된 형상들이 다시 작품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눈에 띈다. 자유로운 자신의 이미지의 전형에 대한 패러디를 통해 정상화되고 규범화된 문화적 패턴에 따라 형성된 주체의 정신성, 즉 자아의 문제를 제기하고, 더 나아가 시지각의 권력관계를 교란시키는 미묘한 심리적 공간으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우선 <깔때기>시리즈에서는 이전의 작품에서 입체 혹은 선으로 표시되던 깔때기가 납작한 여성의 신체부위를 연상시키는 상징적 이미지로 보이면서 뾰족한 부분이 화면 중앙 화단에 위치하는 불안한 구성은 깔때기의 흰색 ․ 주홍색의 원색이 뿜어내는 역동적 에너지와 어우러져 관객의 심리를 불안하게 자극한다. 권여현은 자신의 작품에 빈번히 등장하는 깔때기가 표상하는 것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연관성이 없는 사건들이 산재하는 혼돈의 세계와 논리적으로 정돈된 세계를 연결해 주는 매개체로서의 이미지라고 밝힌다. 일반적으로 주홍색은 눈에 띄기 쉬운 주목성은 있는 지나치게 사용하면 공격적이고 위협적인 이미지를 주고 거부감이 들어 주위의 시선에 부담감을 줄 수 있는 색이다. ‘색’이란 실제로 인간의 신경계를 긴장시키고, 고조시켜 기분에 활력을 주며 또 체온을 상승시키며 호르몬의 연쇄반응을 일으켜 심장박동과 호흡이 빨라지게 하는 생리학적 반응을 유발할 수 있다. 아마도 권여현의 작품 <깔때기>를 대할 때 느껴지는 긴장감은 화면 구성에서 오는 부담감보다 색채가 주는 불안한 느낌이 더 큰 이유일 것이다. 이 주 홍색은 권여현의 1980년대 초기 작품부터 지금까지 화면에 끊임없이 크든 작든 습관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현대도시의 부조리하고 불안한 이면을 암시하는 크레모니니의 주홍색이 연상된다.
작품 <부유자아>시리즈에서 작가의 표현주의적 필체가 강하게 드러나는 붓터치, 날카로운 기하학전 직선, 강렬하게 대비되는 광선에 의해 더욱더 부각되는 보색대비의 화려한 색채는 과감한 구도와 함께 화면의 장소가 터널, 작가의 아틀리에 혹은 내부순환도로의 밑과 같은 현실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시공의 개념을 초월한 형이상학적 가상공간으로 느껴지게 한다. 앞을 향해 달려오는 작가의 이미지는 육체를 가진 존재로서의 ‘자아’, 즉 데카르트적인 의미의 초연한 지성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존재자다. 권여현의 작품에서 표현주의적 색채가 느껴지지만 유럽의 신표현주의는 인간이 극단적인 방향감각의 상실이나 부조리한 상황, 인간의 신체를 정확하게 배치하는 것을 무시하고 인간이 우연히 처한 신비스러운 곤경을 선호한다. 반면 권여현 작품의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주인공의 자세에서 보듯이 인간이 소외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사회의 참여자로서 존재하려는 의지를 느낄 수 있다.
르네상스 미술의 유산인 투시도법에 충실한 삼차원적 건축 공간을 암시하는 풍경과 옷을 벗은 채 앞을 향해 질주하는 자신의 역동적 이미지는 마치 연극무대 혹은 영화 장면을 연상시킨다. 공간을 가로지르는 직선들의 교차, 다양한 형상으로 그려진 상징물들이 수식하는 작가의 개인적 신화에서 출발하는 그의 그림에는 심상치 않은 전략이 깔려 있다. 즉 삼차원적 입체공간에 속도를 표상하는 이미지들은 우리를 가상과 현실 사이에서 혼돈스럽게 한다. 아마도 디지털 세계에서의 가상현실이 게임기 안으로 도피하거나 즐겁게 하거나 혹은 소통하는 것이라면 여기서는 아날로그적으로 현실을 되찾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베이컨의 구성을 연상시키는 원근법적인 깊이를 지니는 전통적인 구조와 장식들, 발튀스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고전적 감성과 고전적 소재, 호프만의 색면 추상과 같이 시원하게 처리한 색면, 앙포르멜의 풍부한 마티에르 효과 그리고 작가의 감정이 살아나는 추상표현주의의 우연적 뿌리기 효과들은 그려진 대상과 내용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도시적인 틀과 정치적 사건들의 관계 속에서 더욱 그렇다. 권여현은 회화의 시각적인 것에 대한 관심으로 늘 작품 안에서의 시각적 효과들을 민감하게 챙기는 기본적으로 회화적인 체질을 타고 났다고 볼 수 있다.
현대에 들어 사회가 파편화되고 인간이해가 점차 기능적으로 변하면서 그러한 존재의식이 사라져 버리고 있다.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과학과 기술은 그것의 성격상 통제 가능하고 기술적인 문제를 다룰 수밖에 없다. 각 개인의 정체성도 소비자나 생산자, 시민과 같이 사회에서 그가 차지하는 역할에 따라서, 교수, 화가와 같이 그의 직업에 따라서 평가된다. 사회경제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으로서 자아는 화면 안에서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고 있다. 여기서 자기성찰에서 출발한 권여현의 존재에 대한 탐구는 단순히 지적인 흥밋거리가 아니라 광범위한 사회비판의식이 그 기저에 깔려 있다. 결국 실존하는 우리에 대해서 말하는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존재한다고 느끼는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권여현의 작품에 의한 세계의 드러남은 재현이 아니라 오히려 환기이자 암시다.
우리의 눈앞에 실제로 있거나 벌어지고 있는 것이 개인에 따라 시대에 따라 시대에 따라, 그리고 문화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내면화될 수 있다. 현실이란 무수한 가능적 존재들 중에서 단지 내 눈앞에 나타난 실제, 혹은 내가 속해 있는 사회와 문화 속에서 약속도니 대로 나타나는 실제일 뿐이다. 우리에게 현실이란 복수로 존재할 수 있다. 사회나 문화가 제공하는 현실이란 오랜 세월 무엇인가를 달성하기 위해 효과적이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기 내면의 또 다른 필요가 그와는 다른 새로운 현실을 요구한다면 권여현은 모든 창의력과 용기를 발휘하여 자신의 현실을 새롭게 표현해 나갈 것이다. 이렇게 현실을 자기 식으로 다루려는 그의 강한 욕구는 사회에서 제공, 훈련하는 시각과 법칙을 넘어서 자기 자신의 현실, 즉 진실을 작업을 통해서 꾸준히 만들어 나갈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