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질그림 - 눈먼 감각, 미끄러운...
2019
내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나무 위의 오필리아가 메두사를 들고 있는 장면
그리고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가 눈을 가리고 있는 장면입니다.
오필리아는 미술로 투영된다는 것과 그 삶이라는 것은
나의 경험과 나의 비전과 혹은 나의 언어 속에 녹아있다 라는 것.
결국은 그 언어와 나의 삶의 궤적들이 붓이라는 것을 통해서 화면에
‘표출된다’라는 것들이 작업의 요체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기표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들, 그리고 상징적이 되거나
환유적으로 생략되는, 많은 감각의 것들은 어떻게 표출할 수 있을까요?
미술이 더 이상 소설이 아니고, 미술이 라오콘의 비명이나, 메두사의 웃음, 그 이외에 다른 해석에 반대하는 많은 논의들을 뒤로하더라도
결국은, 감각을 작동시키는 그 ‘무엇’ 이기 때문인 거죠.
베일로 눈을 가린다라는 것은 결국 그 눈을 가린
시각중심주의 Ocularcentrism이나
phallocentrism에 관한 어떤 촉각성의 부활같은 것들이
내 작품의 주제가 되는 것하고
그것은 질료의 운용을 통해 자신의 현전과 상당히 밀접해 있습니다.
그것은 피부를 통해서 오던지 어머니의 자궁을 통해서 오던지,
혹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미지의 세계를 꿈으로 표현하는 것에서 오던지, 아니면 이 세상 자체를 한바탕의 꿈으로 상정하는
장자의 경우와도 유사합니다.
실은 촉각적인 작업을 통해 시각적 일루젼을 생성하는데 반전이 있습니다.
신화에서 등장하는 오이디푸스라든지 눈먼 사람들이 이끌고 가는 다른 눈먼 사람이라든지 혹은 메두사의 신화라든지
또 혹은 동물과 사람이 하이브리드 되어 있거나 그 위치가 전치되어 있거나
중간에 동양의 소나무와 서양의 유칼립투스 나무가 서로 교차한다 라든지
혹은 그런 식의 포스트모던한 이미지의 일루젼의 배열보다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은 하나의 이 맥거핀적인 이 세상에 관해서 고찰해 보는 것입니다.
제 숲은 굉장히 복잡한 숲이고 감각의 숲이고 디오니소스의 숲입니다.
눈으로 보는 아폴론적이고 혹은 남근중심주의적인 시각에 관해서,
촉각성에 대해서 광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그림에서는 항상 주변에 그려져 있는 것들은 감각들의 붓질의 비규정성의 공화국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오직 어떤 규칙에 의해서 연결되느냐 하면 아이러니하게도
수목적인 규칙에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리좀으로 표현된 줄기들이 더 정교하게 이 전체화면을 규정하는 데에 역설적인 상황이 있다는 것이죠.
바로 그 역설적인 상황들, 전복될 수 있다 라는 상황들,
꿈과 현실이 전복되는 상황들이 내가 표현하고자하는 하나의 순환고리입니다. 그래서 그 순환고리 라는 것들이 정확하게 한 circle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Spiral Circulation처럼 마치 용수철처럼 인접해서 유사성을 가지고 돌아간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놀랍게도 그 순수성이나 감각 그 자체도 교육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면 너무나 두렵기 짝이 없는 거죠.
물질의 움직임이나 그 우연성이 하나의 어떤 물자체로 응고되어서 나에게
스스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상황의 그 물질성에 대해서,
나는 그 물질이 스스로 움직이게끔하고,
스스로 보이게끔하고, 스스로 흐르게끔 그저 나의 손은 도와줄 뿐입니다.
그것은 시간을 가지고 흐르기도 하고, 스며들기도 하고 ,그 자체가 움직이면서
산과 계곡을 만들기도 하죠.
그것은 마치 구름의 모양하고 같아요. 구름의 모양이 뭉게뭉게 퍼져있을 때
단순히 구름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시각이나 우리의 상상력이나
우리의 선험성에 의해서, 소위말해 솜사탕이 되기도 하고 악기가 되기도 하고 우리의 추억이 되기도 하고, 우리의과거가 되기도 하는 거죠.
나는 내 작품에서 네이밍 되기 이전의 많은 우연적인 형상을 만들고 싶습니다. 항상 그 구름의 모양에 사람들은 어떤 형상을 부여하기를 원하는 거죠.
그 형상의 이름이 붙여지는 순간 다시 탈주해서 또 다른 우연의 형상을 계속 만들어 드러내는 거죠.
그 우연의 형상이 어떤 층위를 가지고 적절하게 배합될 때, 그것은 마치
제임스 조이스가 율리시스를 구성하는 그런 형태와 같다 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죠.
시각에 의해서, 규정에 의해서 인간이 재단되는 것.
거기에 대한 역작용으로서 끊임없이 탈주선을 타는 것,
그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들이 내 작업에 중요한 설계입니다.
나무 위의 오필리아가 메두사를 들고 있고,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가 눈을
가리고 있는 그 장면이 가장 상징적인 기표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 순수한 오필리아가 사회화되고 교육될 때, 눈을 가림으로써
오이디푸스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내용을 작업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필리아는 순수함을 상징하기도 하죠.
내 작업의 내러티브가 어떤지 간에 그 내러티브는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 작업에서 보여지는 그 내러티브들은 붓질을 위한
하나의 맥거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죠. 내 그림에서 등장하는 폭포들은
그저 흰 색깔들의 자율적인 움직임들이고, 내 그림에 등장하는 오필리아의
연못은, 오필리아가 죽으면서 자율성을 획득하고 사회화되면서,
하나의 개인성을 갖게 되는 그런 연못 이전에, 푸른 물감들로 덮여진
화면의 한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푸른 물감으로 덮여진 화면의 한 영역을 만들기 위해서,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variety 다양성이 많은, 가능성이 많은, 잠재태로서의 연못을 만들기 위해서 붓질의 마찰 계수를 0도로 만드는 데 주력합니다.
먼저 캔버스를 구성하고 밑 색깔을 칠한 다음, 어느 정도 마르지 않는 기름칠을 계속하게 되는 거죠.
그 기름칠이라는 것은, 잘 미끄러지는 빙판 위에 다시한번 살짝 물을
붓는 것과도 같은 행위죠. 그러면 나의 몸은 그 빙판 위에서 중심을 유지하려는 의지와 자율적으로 미끄러진 우발성과, 위험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그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나는 빙판 위에 걸쭉한 질료들로서 빙판과 접촉하게 하고, 캔버스에 접촉된 붓질은 적당한 압력에 의해서 내가 예상한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미끄러져갑니다. 그 붓의 넓이가 넓으면 넓을수록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거죠. 그렇게 되면 붓의 넓이가 넓을수록 어떤 형태를 만들거나
촉각성, 즉각성, 그리고 어떻게 보면 배덕감 같은 것 일수도 있습니다.
그런 감각의 덩어리들이 가득 차있는 그 숲은 하나하나 정의되고,
정리되어진 나무와 동물과 숲과 집과 폭포들로 채워지게 됩니다.
그 채워진 기물들도, 사물들도, 대상들도 아웃라인이 유격을 가지고
Blur하게 되면서 많은 가능성을 보여주게 되죠.
리트로넬로들의 집합인거죠.
그 위에 다시 리좀의 줄기들로 그림은 선명하게 정리가 됩니다. 리좀은 오히려 수목적이거나 정리된것에 대한 반동으로 줄기 식물인데 내 그림에서는
의미가 전환되고 의미들이 박탈되고 반대 급부로서 정리된 리좀들이 가능성의 나무와 가능성의 바위와 가능성의 사람의 외형을 감싸고 있는거죠.
오필리아는 나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캐릭터입니다.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를 가지고 왔었을 때는, 무의식이론의 삼각구도를
이론을 잘 설명하기 위해서 오이디푸스의 신화를 가지고 왔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명명하고 자신의 이론을 보편화시켰습니다.
그런데 오필리아는 자끄 라캉이 정신분석에 언어를 결합하고 또는, 팔루스라는 여성도 가지고 있는 남근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 O-phallus 가 되는
그 과정을 위해서, 오필리아의 연못에서의 죽음 에피소드를 가지고 오게 되죠. 내 그림에서도 역시 같은 맥락으로 오필리아를 데려옵니다. 나는 지속적으로 자아를 찾아가는 그런 작업을 해왔고 개인적인 자아에서 사회적인 자아로
넘어가는 그 과정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이 있었죠. 그래서 결국은 내자신은
어디서 왔고, 나는 무엇이고, 또 어떻게 살아왔는가?
나는 또 왜 이렇게 만들어졌는가에 관심이 결국은, 사회가 나에게 부여한
죄책감이거나 원죄이기도 하고 사회가 나에게 준선물이기도 하다 라는 의미에서 혹은 사회라는 언어 구조가 나에게 교육하고 길들이게 하고,
착한 몸을 만들어 왔던 것에 대한 순종과
혹은 양가적으로 저항의 정신을 담고 있는 의미에서 그 언어학이라는 것들이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그 언어학이라는 것들을 정신분석하고 연결시킨 것들이 결국은 자아탐구의 정점에서 만나게 되는 오필리아라는 역할이겠죠.
그래서 그 오필리아는 나에게 있어서 두 가지 의미로 설정이 됩니다. 하나는 순수한 오필리아를 상상계 상태로,
코라상태로
혹은 태어났었을 때의 동물적인 상태로 내버려두는,
마치 유토피아와 같은 그런 상태,
아바타에서 등장하는 그런 어떤 fairy같은 상태의 오필리아가 있는 거고
혹은 그 fairy와 같은 오필리아는 동물과 다름없기 때문에 사회화 교육을 시키기 위한 하나의 ‘그물망’으로서의 헌터가 또 등장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나에게는 두명의 헌터가 내가 만든 맥거핀이라는 영상에서 등장하게 되는거죠.
하나는 순수한 동물로서의 오필리아를 상징하는 것이고
하나는 사회화를 시켜야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있는 헌터인거죠.
그래서 그 헌터를 통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사회화 시키는 과정에서 소실되거나 고착된 것들은 어떤 것이고, 혹은 사회화되지 못했었을 때의
오필리아는 어떤 결점을 가지고 있는가를 조망해보는 것들이 맥거핀에서의 오필리아의 역할이었습니다.
그 오필리아가 그물망이라는 공간에서 비어있는 구멍을 뚫고 계속 솟아오르는
그 리좀적이기도 하고, 생명이기도 하고, Elan Vital적이기도 하고,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는 바이탈에 대해서표현하고자 했는데,
결국은 사람의 육필로 표현되는 감각의 마찰력의 제로상태에서 삐져나오는
우연한 어떤 저항정신이나 감각들,
즉 프로이트는 그것들이 꿈의 발현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죠.
내 그림에서는 그것들이 하나의 기표화되어있는 것들 사이에 무수히
깔려있고 삐져나오는 우연의 효과들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결국은 우리 사회가 받아들여야 될 많은 생략됙고 억눌렸던 그 지점들은 나의 캔버스에서는 우연의 효과나, 얘기치 않은 상황이나 그 이벤트들로
표현되고 있죠.
리좀의 덩굴이라는 것들은 하나의 개인성이기도 하고,
혹은 개체이기도 하고, 분자운동이기도 하죠.
내 그림에서는 물론,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다시 영토화되어가지고 그 리좀이라 는 것들이 그림을
꽉 짜여지게 만들고, 완전체로 만들어지는 역전된 현상의 그물망이라고도
표현하고 싶습니다.
결국은 그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는게 아니라 사람을 잡는 어부가
되게 한다라는 그 뜻하고 일맥상통한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죠.
사람을 잡는 그물이라는 것, 그러니까 내가 영상에서 설정했던 그 헌터들은
순수한 오필리아,
누드로 표현되는 순수한 오필리아,
사회화되지 않고 거울상을 통과하지 않은
그 오필리아가
'O'를 떼고 ‘phelia’가 되는 그 과정을 돕기 위해서 두 명의 헌터가 등장하게 되는 거죠.
그 한 헌터는 그러나 자기가 헌팅을 해서 사회화시키고, 교육시키고, 인간으로 만드는 과정에 대해서 굉장한 불만을 표출합니다.
왜 사회화시켜야 되고 인간화시켜야 되는가. 사람은 동물로서의 인간이 순수한 인간이 아닌가를 부단하게 의심하고, 그리고 돌아가기 위해서 그 헌터는
자기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늘 신을 책망하죠. 또 한 헌터는 계속, 무지하게 살고 있는 동물과도 같은 인간에게 사회화 교육을 시키고,
언어를 교육시킴으로써 더불어 사는 세상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은
헌터죠. 그래서 더 많은 오필리아를 찾아서 교육의 이름으로,
사회화의 이름으로 그의 화살을 당기게 되는 것입니다.
내 영상에서는 오필리아는 프리다칼로의 사슴으로 대변되기도 하고
혹은, 토끼나 하이브리드 되기 이전의 상태의 동물로도 표현되기도 하고,
숲으로도 표현되기도 하고, 자연으로 표출되기도 하고, 흘러가는
물의 서큘레이션으로도 표현되기도 합니다.
그 서큘레이션은 결국은 내 그림에서는 붓질에서의 우연성과 즉발성과
촉발성과 미끄러짐과 나의 감당할 수 없는 우연성으로 표현되기도 하죠.
그래서 내 작품에 많은 면적과 많은 퍼센테이지의 기법에서 우연성이
감지되는 것입니다. 다만 그 우연성을 묶어주는 그물의 매듭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수목적인 형태가 아니라 리좀으로 표현된
그 줄기들입니다. 그 줄기들의 연합이 결국은 하나의 듬성듬성하게 구획된,
이 사회체계를 만드는 거죠.
자, 나는 이 그림이 장자의 꿈이기를 원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어떻게 보면 한바탕의 꿈일지도 모른다라는 장자의 말에 동의하게 되는거죠.
결국은 무의식이라든지, 욕망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처음에는 개인의 몸 속에 있다가 구조화되어서 언어 속으로 나왔다가 그게 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되는 더 리얼(The Real)을 구성하게 된다는 것들이죠.
결국은, 내가 만들어 놓은 이 맥거핀의 세상은 하나의 단단한 양파껍질과도
같은 그런 구조입니다. 그 껍질과도 같은 구조 속에 과연 우리가 추구해야될 이상이 있는지, 유토피아가 있는 것인지, 이데아가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들은, 물론 우리의
언어구조망이나 우리의 법률 체계나... 그런것 들에 전적으로 동의를 하죠.
전적으로 동의를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내가 따르고 있는
이 법들은 그저, 인간이 살기 위해 만들어 놓았다라는 그 하나의 제도에
다름 아니다라는 생각에 미치게 되는 거죠. 그럼 결국, 종교에서 추구하거나 혹은 진리에서 추구하는 그 지고한 이데아들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 낸 것 일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에 미치게 되는 거죠.
그렇다면 결국 내 그림에서 만들어지는 나뭇가지라든지, 혹은 저 형상들이 과연 규정될 수 있는 그 형상인가 아니면 나의 act를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이미지상의 어떤 연장일까를 생각해보면 아마도, 결론적으로는 그것들은
하나의 연장이라고 얘기를 할 수가 있겠죠.
말을 배운다라던지 혹은, 사회외 적응한다라는 것들은 우리의 감각을
훨씬 더 섬세하게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불교의 화엄경에서 이야기했던 잡화엄식의 세계와 매트릭스에서 얘기했던 가상의 공간에서 구현되는 개개인의 유토피아의 실현 가능성. 그것들이 작업에서도 구현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결국은 하나하나의 감각들이 분자화되서 살아나가고 그것들이 배치가 되어있고 그리고 그 배치들이 또 다른 가능성을 열게 될 때, 그 작업은 그것들이 어떤 에피소드를 창출을 하든, 어떤 주장을 하든 하나의 자율적인 요소로
구성된다라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Kwonyeo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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