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템브리드(syntagmbrid)에 관한 나의 생각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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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폴론적인 자아 찾기의 소유자다. 프로이드와 라깡의 영향에 의해서 혹은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부터 반 데카르트적인 사고방식으로서 자아찾기에 몰두해 있었다. 신템의 개념은 패러다임에 관한 대칭적인 의미로써 사용되는데 나의 자아에 대한 개연성과 선조적인 생성과정에 대한 집착이다 특히 내가 신템을 공동 작업으로 하는 이유는 학생들과 나는 미술을 숙명의 과제로 받아들이고 있고 현대미술의 컨셉에 관하여 공통 관심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공동 작업은 서로의 공통관심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관한 궁금증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상태에서 서로의 작품 컨셉이 이루어져 있고 그 사실에 간혹은 반론을 제시하기도하지만 대체로는 인정하는 토대위에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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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템브리드는 나의 아폴론적인 자아찾기와 공동작업에 대한 반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나는 켄타우르스나 사피로스 혹은 히드라나 메두사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메두사에 집착하는 이유는 메두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과 함께 어머니가 자식에게 이성적인 사랑을 갈구하는 모순된 상황에 주목하고 있다.(파이드라 혹은 페드라 라고 불리는 여인의 신화에서도 발견되는 에피소드이다.) 그것은 자기 순환을 통하여 종족이나 세계를 유지하려는 자연의 섭리의 또 다른 형태라고 생각된다. 엘렉트라 콤플렉스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만들어 진 것도 자연이 스스로 정화하고 유지하려는 속성을 신화로 표현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그림에서 표현된 사냥의 여신이며 지의 상징인 아테나와 올빼미 그리고 카멜레온으로 표현된 나 자신까지도 실은 자기 한 몸에 자연에 섭리를 가지고 있으며 자기복제, 처녀생식의 순환성에 대해서 자연 스스로 열려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내 이성적인 사고방식은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물 수면위에 떠있는 빙산의 일각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나는 수면에서 보이지 않게 물속에 잠겨있는 (물론 프로이트가 얘기한 잠재의식이나 이드의 정신분석학적인 개념을 배제하더라도) 동물적인 욕구나 광기, 살의 등이 폭력성으로 활동하는 인간의 동물적인 본성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잘 갖춰진 연구실이나 정돈된 작업실에도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동물적인 본능과 살의, 광기를 존중하고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면서도 존중한다.
디오니소스적인 감성과 광기의 필요성은 현대 사회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감추려 할수록 더 활동하는 광기는 현대의 디지털 시대에 오히려 새로운 무대를 맞이하게 된 듯하다. 마치 디지털 문화가 현대의 모든 문화의 주류를 이루는 듯 하지만 사실은 디지털은 아날로그를 분석해주는 도구이고 하드웨어 이다. 즉 아날로그적인 사고방식은 이제 하나의 컨텐츠가 되고 있고 디지털은 하드웨어가 되고 있는 상황이 된다. 복잡하고 설명 불가능하고 도해하기 힘들고 엄청난 파워를 지닌 디오니소스적인 광기는 현대 사회에 있어서 하나의 데이터로 재조명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디오니소스적인 사고방식에 아폴론적 사고방식이 봉사하는 모순된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인간은 소위 필요악이라는 존재를 가지고 있다. 일례로 콜레스테롤은 인체의 피를 굳게 하고 동맥 경화와 심장마비를 유발한다. 그러나 또 콜레스테롤이라는 것은 생식능력을 조장하는 힘을 가지고 있고, 근력을 강화시키고, 식욕을 증진시키며, 그리고 동물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콜레스테롤의 가치는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라는 가정도 가능하다. 우리의 동물적인 광기와 살의와 잔인성, 잔혹함이 일을 추진하는 그 무엇이라고 대입시킨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기능으로서의 동물의 능력이 아니라 본능으로서의 동물성을 신템의 개념에 연결시켜 syntagmbrid 라는 것이 자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시 한번 더 언급하자면, 자아는 신템을 통하여 타인의 머릿속에서 구성되는 이미지라면 브리드 라는 개념은 본인에게 인지되는 정신적, 물리적 움직임이다. 그 본능적 충동은 주체할 수 없는 몸속의 에너지로서 자기의 이성이나 사회의 시스템으로는 해독하기 어렵고 본인이 스스로에 대해서 비이성적으로 인지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데이터로 존재하는 것이다. 결국은 나 자신을 보는 나는 하이브리드의 형태로 존재하고 타인에 의해서 규정되는 나는 신템의 형태로 규정되는 것이다. 그 두 개를 연결하는 매개체로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깔때기라는 이름으로 기호화 시켜 놓기도 했다. 물론 깔때기를 설명할 때는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의 매개체라고 쉽게 말하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신템과 하이브리드의 합성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깔때기의 이미지는 더 이상 funnel 이라는 언어로 규정되기보다는 ‘신템브리드 syntagmbrid’라는 언어로 전환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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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광기는 신의 영역에 접근하는 매우 위험한 처방이다. 그 증상은 기록되지만 그 증상의 원천은 인간의 이성으로 해독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현대 디지털 사회가 아날로그적 감성을 데이터화化 하듯이 이제 광기의 모습이나 살의나 폭력성은 하나의 이해 불가능한 증상이 아니라 인간의 아이덴티티를 규정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광기라는 것은 동물의 식육에서 기인한 인간의 카니발적인 행위와 유사하다. 동물성이라는 것에 대한 인간의 오해는 매우 심각하다. 생존을 위해서 다른 동물이나 다른 개체를 죽이는 행위를 우리는 야만적이라고 매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야만의 실체는 어떻게 보면 너무나 신성한 생존을 위한 죽음을 부여하는 반대급부로서의 또 다른 체계이다.
우리가 흔히 광인이라고 지칭하는 신들린 사람들은 그 행위의 예측불허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다. 신의 뜻은 인간이 알 수 없다. 신들렸다는 것은 인간의 언어로 해독 불가능한 측면이 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 데이터화 되지 않고, 분류되지 않은 그 무엇이 신의 영역이다. 인간의 자아를 결정하는 요소 중에 페르소나로 대변되는 타인과의 관계를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로 규정한다면 인간의 폭력성과 광기는 인간과 인간의 집단 관계가 아니라 인간 과 자연이 조우하는 관계이다. 여기서의 자연은 동물성과 인간과 모든 자연계가 결합되어 있는 최초의 단계 즉 인류 이전의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에 접근하려는 노력은 광기를 주목해야한다. 우리의 머릿속이나 가슴속에서 꿈틀대는 해독 불가능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폭력성이나 광기로 표현되는 신들의 속삭임이다.
나의 신템브리드 syntagmbrid
나는 신템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개인의 자아라는 것이 본인의 인식을 떠나 타인의 머릿속에서 구성된다는 것을 착안하고 일련의 작업들을 통하여 그 사실을 나름대로 증명하고 표현해 왔다. 그러나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던 여러 가지 생각들과 상상들은 나로 하여금 인간의 광기와 본능의 존재, 폭력성의 필요함을 일깨워 주었다. 나는 신템이라는 키워드로 작업을 하면서 아폴론적인 자아 찾기를 통한 이성적인 개념의 정리를 신봉했다. 그러나 나의 주변을 맴도는 부조리함과 광기와 폭력성, 파괴, 잔혹함, 엽기적인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 불길한 상상을 이성으로 차단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이성적으로 차단하려하면 할수록 더 구체적으로 그 실체를 인간과 동물, 인간과 사물의 하이브리드hybrid로 나타내기 시작했다. 나는 비로소 아폴론적인 사고방식을 통하여 반대급부로 늘 존재해 왔던 디오니소스적인 자아를 발견했다. 언제나 내 몸속에 존재하기를 거부해온 콜레스테롤과 같은 존재로서의 디오니소스적 감성은 나에게 있어서 혹은 이 사회에 있어서 필요악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필요악이라는 오명으로 명명되어 온 암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를 유지시키고 궂은 역할을 도맡아 하는 필요선의 존재로 부상하게 되었다. 나아가서는 콜레스테롤을 디오니소스적인 역동성과 동일한 개념으로 그 위치를 격상시켜야 된다고 생각한다. 신템브리드가 내 작업에 새로운 개념으로 등장하게 된 데에는 나의 개인적인 환각이 절대적이다. 나는 항상 작업장 구석에서 등장하는 뱀의 환상과 그림 속에서 살아나오는 올빼미의 눈을 본다. 그리고 나 스스로가 카멜레온으로 변해서 그림 속에 녹아들어가는 과정을 보기도 한다. 그림을 부수고 나를 아끼는 사람이나 물건이나 공간을 파괴하고 위해하려는 충동들은 나를 그리스 신화로 인도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메두사의 집착하고, 히드라나 켄타우르스 혹은 사티로스 등의 신화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오이디푸스의 신화나 엘렉트라, 안티고네, 그리고 메두사의 신화는 현대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근친상간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들려다 보면 그것은 자연이 스스로의 법칙을 정하고 스스로를 유지시키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아들이 어머니를 유혹하고 딸이 아버지를 유혹하는 콤플렉스에서부터 페드라나 메두사는 것은 어머니가 자식을 유혹하는 알레고리 형태로 나타난다. 복수와 무자비한 살육의 상징이며 보면 돌이 되게 하는 저주의 상징이기도한 메두사에게 왜 그런 페드라같은 상징이 붙여졌는지는 자세히 알 길은 없으나 메두사에 집착하는 나의 견해는 무엇보다도 뱀의 상징성과 뱀이라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부위인 머리에 있다는 점을 근거로 자연과 인간 사회의 처녀생식이나 자기복제의 상징이라고 본다. 꽃의 자가수분과 같이 인간 개인도 스스로를 복제하는 능력을 지닌 완결체 라는 것을 보여주는 신화이기도 하다. 나는 현대 디지털 문명은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새롭게 조명시켜 주는 하나의 하드웨어로 보고 있다. 디지털의 하드웨어는 아날로그의 감성과 아날로그의 비논리성과 불명확성, 아날로그의 혼돈을 데이터화 시켜서 해독 가능한 디지털 언어로 바꿔주는 충실한 일꾼이라고 생각된다. 일견 아폴론적인 사고방식은 그 반대급부에 서있는 디오니소스적인 감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존재해온 세례 요한과 같은 존재일 것이다. 나는 신템을 통하여 타인의 머릿속에 구성된 자아를 발견하고 그것에 집착했다. 그러나 내 몸속에서 꿈틀대는 잠재의식의 정신분석학적인 존재에 주목하기 보다는 나의 이성으로까지 감지되는 광기나 폭력성에 주목하고 싶다. 광기와 폭력성은 나 자신에게 나를 보여주고 그 실체가 나 자신이라는 것을 인지시켜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신템은 타인의 머릿속에 구성되는 나이고 브리드는 나의 머릿속에 구성되는 나이다. 그것은 남들에게서는 나의 폭력성이나 나의 광기가 슈퍼에고에 의해서 혹은 페르소나에 의해서 차단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 형태를 나타내는 그 때와 중소는 매우 비밀스럽다. 나는 내 몸속에 꿈틀대는 나의 이성으로 방어되는 동시에 이성의 봉사를 받는 기묘한 불합리를 보여주는 세계와이성의 세계, 그 두 세계를 연결하는 것을 항상 funnel이라는 기호로 그려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미지로서의 깔때기에 funnel이라는 언어를 접목시키기 보다는 신템브리드syntagmbrid라는 단어로 대체되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Kwonyeo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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