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의 현장

넉넉하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행복이라고 하면 좀 추상적인 느낌이 들지만 넉넉함이라고 하면 뭔가 구체적으로 손에 잡힐 것 같기도 하고 잘하면 피부로 느껴질 듯도 하다. 영양실조의 빈혈과 악다구니의 발악보다 좀 포동포동하고 느긋한 여유가, 적어서 인색한 것보다는 많아서 넉넉한 것이 본인에게도 좋고 남 보기에도 덜 민망스럽다.

그 동안 우리는 얼마나 그 넉넉함의 경지를 흠모해 왔는지 그리고 거기에 얼마만큼 도달했는지 이제 길거리를 걸어보면 별로 못난 사람이 없고 모두들 당당해 보인다. 그런데도 그 넉넉함이란 것이 지나치게 물질적인 것에만 편중되고 있다는 걱정도 지울 수가 없다. 물질의 넉넉함도 참 좋은 것이긴 하지만 여기에 못지 않게 정신적인 넉넉함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예술가가 있어 둘 중 하나의 넉넉함만을 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연히 정신쪽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예술이란 정신의 넉넉함을 일구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얼마전 언론의 집중과 국민의 분노를 샀던 대학입시 예능계 부정사건도 따지고 보면 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부족한 채로 무작정 예술가의 길을 나섰거나(차라리 장사꾼으로 나갔으면 더 좋았을 것을) 아니면 처음엔 비장한 각오로 예술의 길을 택했지만 세파에 애초의 초발심이 문드러져 자신도 잘 모르는 캄캄한 길을 헤매고 있는 자들이 겪어야 할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가치에 앞서는 것이 경제이고 따라서 모든 직업인이 자신의 본래 소명은 항상 부업으로 하고 경제적인 이익이 전업이 되고 마는 이런 집단적인 분위기 속에서 욕할 것은 예술가뿐만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이런 모질지 못한 변명이 그 동안 우리를 얼마나 추하게 만들어왔는지를 생각해 봐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권여현씨의 작업실은 동작대교를 건너서 사당동쪽으로 빠지는 길가에 있다. 마을금고의 3층이 작업실이다. 이제 갓 30을 넘었으니 젊은 나이다. 결혼도 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번 서원대학에 강의를 나가는 날 말고는 화실에서 입시생들을 지도하고 개인작업실에 돌아와서 작품을 하는 그 나이 또래의 화가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평범한 생활을 그도 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남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놀란 것은 작업실의 규모와 거기에 채곡채곡 쌓아놓은 작업량이었다. 촬영을 하러 가는 날도 작업을 하고 있었다. 겨울이라서 유화물감이 잘 마르지 않기 때문에 아크릴로 그려서 햇볕이 잘 드는 문지방에다 놓고 말리고 있었다. 학원에서 번 돈을 몽땅 작업실에 때려넣는다고 한다. 40평쯤 되는 작업실을 혼자서 쓰려면 월세가 많이 들 거라는 생각을 해봤다. 그러니 다른 생활이라는 곁가지가 없다. 아직 비행기도 못타봤다고 한다. 전기밥솥이 잘 씻겨져 있었다. 누나 집에서 기식을 하지만 한번씩 여기서 끼니를 때우는 모양이다. 깨끗하게 밥통을 잘 씻어다 물기를 빼려고 뒤집어 놓았다. 겨울에는 빨리 마르는 아크릴을 여름에는 건조가 더딘 유화를 주로 사용한다. 모든 생활의 중심이 창작에로 집중된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작업은 게을리 하면서 어떻게 요행수를 바라거나 정치적인 인맥형성에 정력을 헛되이 낭비하는 것과는 근본부터가 아예 다르다. 더구나 졸부들 못지않은 젊은 미술학원재벌들의 번질거리는 생활과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다. 그 점이 참 고맙게 느껴졌다.

황강의 상류라고 할 수 있는 합천 대병이 그의 고향이다. 전에는 깨끗한 물이 빠른 속도로 흘러서 황강에는 어족이 풍부했다. 여름이면 은어가 무르팍을 간질이는 얕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곤 했다. 합천 모래는 굵고 깨끗해서 서부경남의 왠만한 토목공사에는 이 지역모래가 써졌다. 그런데 몇 해 전 합천댐이 생기는 바람에 상류의 대병은 수몰지역이 되고 말았다. 살던 집이며 매일 나다니던 삽작이며 동네어귀의 느티나무며 국민하교 교정의 철봉대도 모두 물 속에 잠겨버린 대병 사람들이 기막힌 실향민이 되고 말았다. 전에 이문구의 징소리란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시침을 떼고 있는 저 깊은 곳에서 밤마다 징소리가 전날의 축일 때와 마찬가지로 들려온다는 것이다. 고향을 떠난다는 거와 잃는다는 것은 엄청나게 다르다. 그리고 다시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잃음과 천지가 개벽을 하거나 상전이 벽해되는 과정을 거꾸로 밟지 않은 다음에야 되찾을 길이 없는, 사실상 불가능한 잃음과는 또 다른 것이다. 삼팔선보다도 더욱 견고한 경제의 수면이 거기에는 있다. 자기가 살아왔더 유년의 현장이, 정서의 가장 구체적인 기반이 햇빛도 잘 들지 않는 컴컴한 심연 속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누워 있다는 것을 상상해보라. 물 속을 자맥질하며 헤매이는 기억의 잔영들. 그런 사실과 얼마만큼의 연관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권여현씨의 그림에는 깊고 어두운 원근감이 화면을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권여현씨는 개성적인 작가라기보다는 독자적인 작가다. 기초에 충실하면서 젊은 사람이 흔히 감동하기 쉬운 사조의 흐름에 초연한 편이다. 서울대학교를 다닐 때에는 어떤 젊은 교수가 그림을 너무 답답하게 그린다고 충고를 주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생각하는 회화의 원론에 그는 충실하고자한다. 개인적인 세계와 개인적인 수련이 갖는 미덕이 폄하되고 있는 요즘의 사정을 감안한다면 좀 예외적인 경우다. 최근에 와서 새로운 구성이란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되어버렸지만 권여현씨는 처음부터 자기식의 구상회화를 계속 그려왔다. 그렇기는 해도 요즘 인기있는 작풍과는 다른 데가 많다. 그것은 그가 고전적인 회화기법에 애착을 갖고 있다는 사실과도 통할 수 있는 얘기인데 그것은 말하자면 평면적이고 기호적인 구상이 아니라 원근법적이고 구체적인 구상이라는 점, 부드러운 털의 장봉으로 서체식의 즉발적인 운동감을 강조하는 붓놀림이 아니라 짧고 단단한 붓으로 유화의 본래적인 특징에 맞는 매우 구축적인 붓작업이라는 것이 그렇다. 그에게 있어서 공간감이라 매우 중요한 요소로 화면을 지배하고 있다. 이태리 형이상학파 작가들에게서 흔히 보여지는 공간을 통한 시간의 소격효과가 여기서는 공간의 왜곡이 아닌 공간에 따른 인물의 배치 혹은 상황설정의 문학적 효과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다. 문학이라도 비교적 사소설이다.

문학이고 예술이고 간에 개인의 체험과 상상력이 지나치게 드러나는 것이 불온한 것처럼, 혹은 나약한 것처럼 생각되던 시기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있었다. 개성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공적이고 일반적인 감성과 이해의 기반 위에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었던 때도 이때였다. 그래서 우리는 개성의 확보 이전에 독자성의 강구가 더 시급했는지도 모른다. 거듭 말하지만 권여현씨는 매우 개인적이고 독자적인 작가이다. 그의 회화는 남이야 어떻게 평가를 하든 말든 고향의 수몰체험에 따른 개별적인 아픔에서부터 어둡고 깊은 공간감을 통한 세계의 인식에 이르기까지 그 하나 하나의 과정이 철저히 권여현이란 한 개인의 통로를 통해서 진행되어 왔음을 알아야 한다. 이런 연유에서인지 때때로 그의 자화상인 듯한 인물이 엉거주춤 등장한다. 개성이라는 적극적인 표현은 부적절하고, 한없는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 잠깐 조연으로 출연했다가 사라질 듯한 담담한 표정의 개인이다. 특히 최근의 작품에서는 이미 잘 알려진 역사 속의 인물들까지도 그런 공허함으로 몰아가고 있다.

얼마 전에 제 10회 석남 미술상을 받아 수상작가전을 한국미술관에서 했다. 남들보다 특별히 나을것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큰상을 받게 되었다며 고맙고 쑥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런 겸손도 그가 가진 진정한 넉넉함에서 나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깨끗한 대리석에다 조각도로 곱게 밀어서 나온 조각과도 같이 윤곽이 뚜렷하고 섬세한 미남의 이 젊은 작가가 바라다보는 길은 어디로 뻗어있는가?

수몰된 고향, 도시의 사람들 속 아니면 현현(玄玄)한 우주, 그도 아니면 이미 공간에서 일탈해버린 시간의 또 다른 좌표? 궁금할 뿐이다.